최 씨, 준비한 칼로 경동맥 20여 차례 찌르고 환복…해마다 범죄 증가하는데 피해자 보호 제도 부실
#가해자 최 씨, “계획범죄” 시인
경찰에 따르면 서울 소재 명문대 의대생인 최 씨는 5월 6일 오후 5시쯤 강남역 근처 한 건물 옥상에서 교제 관계에 있었던 피해자에게 흉기를 휘둘러 숨지게 한 혐의를 받고 있다. 당초 경찰은 ‘옥상에서 남성이 투신하려 한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했다.
구조된 최 씨는 경찰서에서 ‘왜 투신하려 했느냐’는 경찰의 질문에 80분여 침묵을 유지했다. 이후 부모와 통화하는 과정에서 “약과 소지품이 든 가방을 두고 왔다”는 발언을 했고 이를 엿들은 경찰이 소지품의 위치를 묻자 그제야 “옥상에 두고 왔다”고 답한 것으로 전해졌다.
다시 현장을 찾은 경찰이 숨진 피해자를 발견했고 최 씨를 긴급체포했다. 피해자는 80분 넘게 심정지 상태로 옥상에 방치돼 있었다.
최 씨는 경찰 조사에서 헤어지자는 말에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또 범행 5시간 전 경기도 화성시의 한 대형마트에서 흉기 2점을 미리 구입하고 피해자를 불러내는 등 범행을 사전에 준비한 것으로 조사됐다.
부검 결과, 피해자의 사인은 흉기에 의한 과다 출혈(자창에 의한 실혈사)이었다. 경찰에 따르면 최 씨는 미리 준비한 흉기로 경동맥이 지나가는 피해자의 목 부위를 20여 차례 찔렀다. 경동맥은 심장에서 뇌로 혈액을 공급하는 주된 혈관 가운데 하나로 목 양쪽에 위치한다. 경동맥이 손상되면 뇌로 가는 혈류가 줄어들기 때문에 부상을 당하면 치명상을 입을 수 있는 급소 중 하나다.
가해자 역시 계획범죄였다고 시인했다. 최 씨의 국선 변호인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혐의를 모두 인정했다고 한다. 또 우발적인 범죄가 아닌 계획범죄였다는 사실도 인정했으나 범행을 계획한 기간이 길지는 않았다고 덧붙였다. 한편 MBN 보도에 따르면 최 씨는 범행 직후 다른 옷으로 갈아입기도 했다. 경찰은 그가 범행 후 혈흔이 튈 것을 대비해 미리 옷을 준비해둔 것인지 수사를 진행 중이다.
서울중앙지법 신영희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5월 8일 살인 혐의를 받는 최 씨에 대한 영장실질심사를 열고 “도망할 염려가 있다”며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경찰은 정확한 경위를 파악하기 위해 10일 최 씨에게 범죄심리분석관(프로파일러)를 투입해 사이코패스 진단 등 각종 심리 검사를 받도록 했다.
다만 최 씨의 신상정보는 공개하지 않는다. 중대범죄신상정보법에 따르면 수사기관은 ‘범행수단이 잔인하고 중대한 피해가 발생한 경우’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해야 할 경우’ ‘충분한 증거가 있는 경우’ ‘재범 방지 및 범죄예방’ 등 4가지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피의자의 신상을 공개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의 가해자 신상이 공개되면 피해자도 노출될 수 있어 유족의 의사를 반영해 신상공개위를 개최하지 않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러나 수사가 진행되며 검찰 단계에서 ‘머그샷 공개법’이 적용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머그샷 공개법은 불리는 특정중대범죄피의자 등 신상정보공개에관한법률에 따라 검사나 수사기관이 중대 범죄 피의자의 얼굴을 강제로 촬영해 공개할 수 있도록 한 법이다.
#“범죄 패턴으로 봤을 때 전형적인 교제 살인”
한편 이번 사건은 피의자 최 씨가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만점을 받은 명문대 의대생임이 알려지면서 더욱 주목을 받았다. 많은 매체와 인터뷰를 하고 입시 멘토로 활동한 자료가 온라인에 남아있는 것 역시 대중의 이목을 끌었다. 최 씨는 과거 인터뷰에서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는 좋은 의사가 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가해자의 신분이 의대생인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배상훈 우석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이번 사건은 전형적인 교제 살인이라고 분석했다. 배 교수는 9일 일요신문에 “가해자 신분은 이 사건의 본질이 아니”라며 “교제 당시부터 과도한 소유욕으로 인한 집착과 협박을 일삼다 헤어지면 위해를 가하는 것은 범죄 패턴으로만 봤을 때 매우 전형적인 교제 살인”이라고 말했다.
다만 살해 동기에는 심리가 중요하기 때문에 최 씨의 배경이 어느 정도 작용했을 수 있다고 봤다. 배 교수는 “자아 정체성이 높은 경우, 즉 최 씨가 평소 자신을 굉장히 의미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다면 ‘감히 나를 버려?’와 같은 어긋난 생각이 작용했을 수는 있다. 지나친 선민의식을 가진 사람이 타인과의 관계가 어긋났을 때 느끼는 분노가 폭력화된 사례”라고 말했다.
한편 두 사람을 연인관계로 표현하는 것이 적절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됐다. 성폭력 피해자를 돕는 한 활동가는 “피해자가 이별을 원했고 관계 단절에 대한 이야기를 반복했으면 두 사람의 관계는 이미 끝난 것이다. 그럼에도 가해자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피해자에게 지속적으로 위해를 가했다면 언론에서 범죄 피해자를 ‘여자친구’라고 표현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교제 살인의 원인 가운데 하나는 관계에 대한 피해자의 생각과 가해자의 생각이 일치하지 않는 것에서 비롯된다. 배 교수는 교제 폭력의 피해자가 겪는 구체적인 상황을 예시로 들었다. 그는 “교제 폭력에서 ‘죽겠다’와 ‘죽이겠다’는 동의어다. 피해자는 자신이 원치 않음에도 ‘나오지 않으면 죽겠다’는 가해자의 협박에 끌려 나오게 된다. 이후 ‘무릎을 꿇겠다’거나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겠다’고 말하는 가해자를 달랜다. 매우 전형적인 상황”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여기서 또 발생한다. 제삼자나 피해자 입장에서는 눈앞의 위험한 상황을 겨우 말린 것인데, 가해자는 두 사람의 관계가 회복됐다고 느낀다. 배 교수는 “피해자는 점점 멀어지는데 가해자는 다시 가까워졌다고 생각한다. 일종의 망상”이라고 꼬집었다.
실제로 자신을 피해자의 언니라고 밝힌 한 네티즌은 피해자의 인스타그램에 “어느 날 동생이 최 씨에게 헤어지자고 말했는데, 갑자기 ‘죽고 싶다’며 옥상에서 수차례 뛰어내리려 했다”며 “동생은 착한 마음에 죽으려는 걸 막다가 이미 예정되어 있던 최 씨의 계획범죄에 휘말려 수차례 흉기에 찔려 죽음을 당했다”고 했다.
#2023년 교제 폭력 신고 건수 7만 7150건
실제로 최 씨 사건과 같이 연인 사이에서 발생하는 교제 폭력 및 살인은 거의 매달 발생하고 있다. 지난 4월 1일 경남 거제에선 20대 남성이 전 여자친구를 수차례 때려 숨지게 한 혐의(상해치사)로 긴급체포됐다.
살인 혐의로 기소돼 신상이 공개된 김레아(26)도 교제 살인 피의자다. 김 씨는 3월 경기 화성시에 있는 자신의 자택에서 이별을 통보하려 한 피해자에게 흉기를 휘둘러 살해하고 그의 어머니까지 크게 다치게 했다. 검찰 수사 결과, 김 씨는 평소에도 피해자의 휴대전화를 수시로 확인하며 남자관계를 의심했다. 또 ‘헤어지면 너도 죽이고 자신도 죽을 것’이라는 말을 하는 등 강한 집착을 보이는 동시에 폭행도 행사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1월 사망한 부산 오피스텔 추락사 피해자 역시 전 연인의 스토킹에 시달렸다. 유족에 따르면 피해자는 가해자와 헤어지고자 6개월 가까이 이별을 시도했다. 그러나 가해자가 17시간 동안 피해자의 집 현관을 두드리거나 365차례에 걸쳐 피해자에게 카카오톡 메시지를 전송하는 등 스토킹을 했고, 피해자는 이에 시달리다 숨졌다. 가해자에게 살인혐의가 적용되지 않았지만 유족은 타살을 주장하고 있다.
5월 8일 경찰청에 따르면 교제 폭력 신고 건수는 2020년 4만 9225건에서 2023년 7만 7150건으로 56.7% 증가했다. 검거된 피의자 수는 2023년 1만 3939명으로 2020년 8951명에서 55.7%나 증가했다. 범죄 유형으로는 폭행·상해(9448명·67.8%)가 가장 많았고, 체포·감금·협박(1258명·9%), 성폭력(453명·3.2%) 등 순이었다.
2024년 1~3월에도 1만 9098건의 신고가 들어왔고 이 가운데 3157명이 검거됐다. 하지만 구속 수사 비율은 현저히 낮다. 교제 폭력 및 살인으로 구속된 피의자는 2023년 310명으로 검거된 전체 피의자의 2%대에 그쳤다.
해마다 범죄 건수는 증가하는데 정작 피해자를 보호할 수 있는 제도는 부실하다. 가까운 관계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피해자는 가해자의 위협에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노출되고 재빠른 신고나 강력한 처벌 의사를 표하기 어렵다. 그런데 교제 폭력은 폭행죄로 분류되는 까닭에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아도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반의사불벌죄 규정도 없다.
이러한 범죄 특성을 잘 알고 있는 수사관을 만나기 어렵다는 것도 문제다. 앞서의 활동가는 “얼굴만 아는 지인이어도 경찰에 신고하는 게 어려운데 한때 친밀한 관계에 있던 사람을 신고하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라며 “용기를 내 경찰서를 찾아도 피해 정도와 반복성을 기준으로 ‘그 정도면 단순한 연인 싸움 아니냐’는 식으로 대응하는 수사관이 적지 않다. 위축된 피해자는 더 이상 수사기관의 도움을 기대하지 않게 된다. 그 사이 범행은 반복되고 결국엔 죽음으로 끝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스토킹처벌법처럼 접근 금지 명령을 내릴 수도 없다. 교제 폭력 피해자가 겨우 신고를 했다고 해도 가해자가 주위를 맴돌며 선처나 합의를 종용해 사건이 무마되었다가 결국 중범죄로 이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교제 폭력을 막기 위한 법안은 번번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21대 국회에서는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가정폭력의 정의에 교제 관계를 포함하여 교제 폭력 범죄에도 임시조치 등의 피해자보호제도를 적용하게 하는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지만 법제사법위원회 심사단계에서 3년째 계류 중이다. 21대 국회는 5월 29일 임기가 만료된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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