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혹시 파리의 지하 도시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가. 파리 시민들 가운데서도 극히 일부에게만 알려진 이곳은 다분히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곳이지만 지상 못지않게 볼거리가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령 미로처럼 얽힌 통로와 넓은 광장이 있고, 심지어 술집과 해변, 도서관, 영화관도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이곳을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600만 구의 유골들도 있다. 이곳에 이렇게 많은 유골들이 있는 이유는 바로 이 곳이 파리 도심의 지하에 위치한 카타콤베, 즉 지하 납골당이기 때문이다.
독일 시사주간 <슈테른>은 최근 어둠을 찾아 파리의 은밀한 지하 세계를 찾는 탐험가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그리고 이곳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보도했다. 우리가 몰랐던 파리의 은밀한 지하 세계는 과연 어떤 곳일까.
파리의 지하 납골당은 어둠을 좇는 사람들에게는 축제와 침잠의 장소다.
밤 10시가 조금 안 된 시각, 오를레앙문 근처. 어둠이 내려앉은 도로 위에 한 남성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서있다. ‘프랑수아’라는 닉네임을 사용하고 있는 이 남성은 근처에 경찰이 없는 것이 확인되자 재빨리 맨홀 뚜껑을 열고는 이내 땅 밑으로 사라졌다.
거의 매일 밤 이렇게 맨홀 뚜껑을 열고 지하로 내려가고 있는 ‘프랑수아’는 파리에서 활동하는 ‘카타필’ 즉, ‘지하 탐험가’다. 하수관이나 지하철보다 더 깊은 지하 20~30m에 위치한 거대한 지하 납골당을 탐험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이자 취미.
현재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는 지하 탐험가들은 100~200명가량으로 추산되고 있으며, 이들은 빛의 도시로부터 도망쳐 어둠 속에서 자유를 찾는 사람들이다. 구속이나 규제보다는 자유를 갈망하며, 지상 세계에서 떨어진 지하에서 자신들만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자유를 추구한다고 해도 나름의 규칙과 관습은 있다. 가령 본명보다는 아모크, 타코, 드라카엘 등 닉네임으로 서로를 부르는 것도 이런 규칙 가운데 하나다. 이 가운데 몇몇은 전설적인 인물로 통하고 있다. 두더지라는 뜻의 ‘라 타우페’라는 인물은 별명처럼 땅 속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면서 새로운 터널과 연결 통로를 발굴해낸 업적(?)으로 유명하다. 그런가 하면 ‘예술가 싸이’라는 인물은 지하 납골당 벽면에 조각을 새기는 예술가로 유명하다. 그는 지상에서는 화려하게 색칠한 해골을 기념품으로 전시 및 판매하는 예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도서관에는 편한 좌석은 없다. 하지만 무료로 이용할 수 있으며, 약간의 빛도 들어온다.
그런가 하면 ‘지하 탐험가’로 활동하는 10대 소년들도 많다. 15세인 ‘토토’도 그런 소년 가운데 한 명이다. 벌써부터 지상 세계에 싫증을 느낀 소년은 틈만 나면 친구들과 삼삼오오 지하 터널에 모여 시간을 보내곤 한다. 이 곳에서 소년은 친구들과 음식도 해먹고, 몰래 맥주를 마시기도 한다.
‘다비드’라는 별명의 ‘지하 탐험가’는 아마추어 고고학자다. 그는 1년에 대여섯 차례 지하 납골당으로 내려와서는 취미삼아 벽에 새겨져 있는 그림을 찾아내곤 한다. 그가 발견한 벽화 가운데는 심지어 150년 된 것도 있었다.
파리의 지하 세계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상당히 복잡하게 얽혀있으며, 셀 수 없이 많은 터널이 미로처럼 뻗어 있다. 길이만 무려 300km에 달할 정도다. 그렇다면 대체 이렇게 거대한 지하 납골당은 누가, 언제, 그리고 왜 조성한 걸까. 왜 파리의 지하에는 이처럼 거대한 규모의 납골당이 존재해야 했던 걸까.
사실 이곳이 처음부터 납골당으로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그 전에는 수백 년 동안 채석장으로 사용되어 왔었다. 때는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로마 제국은 석회암을 채굴하기 위해 파리의 지하를 채석장으로 이용했으며, 로마 제국이 몰락한 후에도 이 채석장은 당시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던 파리의 건축물들을 짓는 데 필요한 재료를 제공하는 곳으로 이용됐다. 노트르담 성당, 루브르 박물관 등에도 이 곳에서 채굴된 석회암이 사용됐다.
하지만 지하를 벌집처럼 뚫다 보니 간혹 지반이 무너져 내리는 사고도 발생하곤 했다. 1774년에는 주택가의 도로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 대형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으며, 안전 사고가 끊이지 않자 파리 당국은 지하 채석장에 대한 안전을 강화해야 했다.
탐색을 마친 지하 탐험가들이 해변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다.
그러던 중 1785년, 파리에서는 공동묘지 포화 현상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오르고 있었다. 파리에서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어깨를 마주하고 산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며, 오죽했으면 일부 파리 시민들은 물과 빵에서 시체 냄새가 난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이에 파리 시당국은 공동묘지에 묻혀있는 유골들을 대거 지하로 이전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렇게 지하로 옮겨진 유골은 모두 약 600만 구였다. 이렇게 채석장에서 납골당으로 바뀐 지하는 19세기만 해도 파리 시민들의 나들이 장소로 각광받았었다. 파리 시민들은 주말이 되면 가족들과 함께 지하 세계로 소풍을 왔으며, 아름답게 꾸며진 터널에서는 음악회, 낭독회 등 문화 행사가 열리기도 했었다.
19세기 중반부터 맥주통 저장고나 버섯 양식장으로도 활용됐던 지하 납골당은 하지만 2차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당시에는 한때 독일 점령군의 벙커로 사용되기도 했었다. 전쟁이 끝난 후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자유롭게 드나들었던 지하 공간은 하지만 이용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자 당시 파리 시장이었던 자크 시라크의 명령 하에 출입이 전면 금지되었다. 파리 도심에서는 수백 개의 맨홀 뚜껑이 사라졌고, 지하로 연결된 통로들은 콘크리트로 메워졌다. 파리 경찰국에는 지하 침입자들을 감시 및 추적하는 특수반이 신설되기도 했다.
이런 까닭에 현재 관광객들에게 공개되어 있는 지하 납골당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일반에게 공개된 구역은 2km가 전부며, 나머지 대부분은 출입금지 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핼러윈이 되면 이 공개 구역에서는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가령 2015년에는 숙박공유서비스 업체인 에어비앤비와 함께 지하 동굴에 침대를 설치하고 하룻밤을 보내는 이벤트가 개최되기도 했었다.
지도가 없으면 경험 많은 탐험가들조차도 어지럽게 얽혀있는 미로에서 때때로 길을 잃곤 한다.
하지만 진정한 ‘지하 탐험가’들에게 있어 지하 세계의 이런 상업화 현상은 악몽 같을 수밖에 없다. 자신들만의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장소가 관광객들에게 점령당하는 것을 꺼리고 있는 이들은 가능한 관광객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출입금지 구역을 돌아다니면서 자신들만의 비밀스런 모임을 갖고 있다. 가령 자신들이 만든 공간에서 파티를 열거나, 술을 마시거나, 책을 읽기도 한다.
비록 편한 의자는 없지만 조금이나마 빛이 들어오는 도서관에서는 무료로 책을 읽을 수 있으며, 바에 앉아서는 커피나 술을 마실 수도 있다. 또한 돌을 깎아 만든 좌석이 마련되어 있는 영화관에서는 대형 스크린을 통해 최신 영화를 감상할 수 있다. 심지어 해변도 있다. 물론 진짜 해변은 아니다. ‘지하 탐험가’들 사이에서 해변으로 통하는 곳은 일본의 목판화가인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작품인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를 본뜬 그래피티가 그려져 있는 곳이다. ‘지하 탐험가’들은 하루의 탐험을 마친 후 이 곳에 모여 잠시 쉬어가곤 한다.
워낙 규모가 크기 때문에 종종 길을 잃는 사람들도 있게 마련. 하지만 ‘지하 탐험가’들이 어지럽게 얽혀있는 미로에서도 좀처럼 길을 잃지 않는 이유는 정밀하게 제작된 지도 덕분이다. 이 지도는 ‘지하 탐험가’ 일원으로 허락된 사람들에게만 제공되는 것으로, 200년 전 채굴감독관이었던 기요모라는 사람이 완성한 것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이 지도는 파리 지상의 지도보다 더 정확하고, 더 신뢰할 수 있으며, 지상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도로 이름도 명시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요모가 과거 광산 노동자들을 시켜 벽에 조각해 놓은 지도를 ‘지하 탐험가’들이 종이에 옮겨 그린 이 지도는 오늘날 모험가들과 탐험가들, 그리고 아마추어 고고학자들 사이에서 길을 찾는 용도로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다.
빛을 등지고 어둠으로 숨어드는 이들에게 파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분명 또 다른 모습일 것이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