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 경찰이 발행한 김정남 사망 관련 보도 자료
14일 오후 11시 말레이시아 경찰 당국은 하루 앞선 13일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 제2청사 고객 서비스 카운터에서 의료 지원을 원한 한 남성이 병원으로 이송 도중 사망했다고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이 남성의 이름은 김철(47)로 북한 평양 출신이었다.
김철은 김정남 씨가 자주 사용하는 가명으로 알려졌다. 김 씨 소유로 알려진 소셜 미디어 페이스북 계정 역시 김철(Kim Chol)로 표기됐다. 중국을 오가는 한국인 사이에서 가명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이름 가운데 하나가 김철이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같은 날 13일 공항에서 사망한 북한 남성이 김정남이라고 확인하며 북한의 시신 인도요청을 받았다고 밝혔다. 아흐마드 자히드 말레이시아 부총리는 16일 현지 기자 등과의 만남에서 “13일 공항에서 사망한 북한 남성은 김정남이 맞다. 신분증 2개를 가지고 있었다. 이제까지 알려진 김철은 위장용이었으며 실명은 김정남”이라고 밝혔다.
정확한 사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독극물일 가능성이 높은 상태다. 14일 말레이시아 경찰 범죄조사국 부국장 파드질 아흐마트는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김정남 씨는 출발 대기장 안내 데스크 직원에게 ‘누군가가 그를 뒤에서 잡고 얼굴에 액체를 뿌렸다’고 말하며 도움을 청했다. 즉각 공항 내 치료소로 이송됐다. 김 씨는 두통을 느끼고 어지러움을 호소했다. 약한 발작증세도 보였다. 기절하기 직전이었다”며 “공격 도구가 천이었는지 바늘이었는지 아직 우리는 알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말레이시아 경찰은 15일 부검에 돌입했다. 부검 결과는 나왔지만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특별한 이유에 대해서도 말레이시아 경찰 당국은 묵묵부답인 상태다. 다툭 압둘 사마 맛 말레이시아 셀랑고르 경찰서장은 17일 <일요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아직까지 아무 것도 답해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용의자 3명이 검거됐지만 암살을 사주한 주체는 아직까지 드러나지 않았다. 다만 북한의 소행이라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북한은 말레이시아 정부에 “부검을 하지 말고 시신을 넘겨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말레이시아 정부는 “어떤 외국 정부라도 시신 인도 요청이 있다면 가능하게 만들겠다. 다만 경찰 수사와 의학적 절차가 마무리된 뒤 마무리하겠다”며 “북한이 공식적으로 부검에 항의하는 서신을 보내지 않아 부검을 진행했다”고 전했다. 사인을 밝히지 말고 시신 인도를 요청한 북한의 움직임에 “북한의 소행이 분명하다”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북한의 암살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이는 이전까지 북의 암살 방식과 다른 양상을 띤다. 북한은 보통 총기나 독침을 사용해 왔다. 지난 1997년 2월 15일 오후 김정일의 처조카 이한영 씨(당시 36세)는 경기 성남시 서현동 자택 엘리베이터 앞에서 총에 맞아 사망했다. 남파된 북한 공작원의 소행이었다.
총기에 비해 독침은 좀 더 광범위하게 사용됐다. 2011년 8월 21일에는 중국 단둥에서 대북 선교활동을 하던 김창환 선교사가 독침 공격으로 숨졌다. 재판부가 인용한 보고서에 따르면 김 선교사는 브롬화 네오스티그민(Neostigmine Bromide) 중독으로 사망했다.
브롬화 네오스티그민은 브로민(Bromine)과 네오스티그민을 결합해 만들어 낸 화학제다. 청산가리보다 5배 강한 독성을 보인다. 브로민은 액체 형태일 때 적갈색을 띠며 악취를 풍긴다. 염산과 비슷하게 신체에 닿을 경우 상해가 발생한다. 기체 형태일 때는 눈과 목에 매우 해롭다. 주로 독침에 사용되는 원료로 지난 2011년 10월 검찰은 자유북한운동연합 박상학 대표 암살 시도 용의자는 브롬화 네오스티그민 독침이 발사되는 볼펜을 지니고 있었다.
현재까지 구속된 용의자는 3명이다. 김정남 씨가 피살된 다음날인 15일 오후 5시 30분 말레이시아 경찰은 이날 오전 8시 20분쯤 용의자 가운데 한 명인 베트남 국적 도안 티 흐엉(29·여)을 구속했다고 전했다. 경찰에 따르면 이 여성은 공항에서 혼자인 상태로 체포됐다.
추가로 용의자 한 명이 더 구속됐다. 말레이시아 경찰은 16일 오전 11시 30분 같은 날 오전 2시에 김정남 살해 용의자로 보이는 인도네시아 국적 여성 시티 아이샤(25·여)를 앞서 잡힌 도안 티 흐엉과 같이 공항에서 구속했다고 밝혔다.
같은 날 시티 아이샤의 남자친구이자 3번째 용의자인 말레이시아 남성 무함마드 파리드 빈 잘라루딘(26)이 경찰에 붙잡혔다. 말레이시아 경찰은 이 남자 역시 여자 2명과 함께 김정남 씨 피살에 관여한 혐의로 조사하고 있다.
하루 앞선 15일 이병호 국가정보원장은 국회 정보위원회 간담회에 출석해 김정남 피살 관련 내용을 보고했다. 이 원장은 “이번 암살은 5년 전부터 치밀하게 준비됐으며 정찰총국을 비롯한 북한 정보당국이 가담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국정원은 정찰총국과 북한 정보당국은 김정남 씨 암살 기회를 5년 정도 노렸다고 전했다. “암살 주체는 정찰총국이라고 추정된다”고도 했다. 해외에서 펼쳐진 비밀 작전은 보통 정찰총국에서 총괄했다는 게 국정원의 설명이었다. 물론 김정은 위원장이 직접 챙기는 중요 작전이라는 점에서 여러 기관이 가세했을 가능성도 크다고 보고 있다.
국정원은 김정남 씨 암살이 김정은의 ‘스탠딩 오더’였다고 설명했다. 스탠딩 오더는 취소할 때까지 계속 유효한 주문이다. 실제로 2012년 초 암살 시도가 한 번 있었다. 김정남 씨는 같은 해 4월 김정은 위원장에게 선처를 부탁했다. 김 씨는 “저와 제 가족에 대한 응징 명령을 취소하기 바란다. 저희는 갈 곳도, 피할 곳도 없다. 도망갈 길은 자살뿐임을 잘 알고 있다”라고 쓴 편지를 김정은 위원장에게 전한 바 있다.
최훈민 기자 jipcha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