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가 10일 낮 청와대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만나 미소 띤 얼굴로 악수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한나라당 핵심 관계자는 지난 10일 극적으로 성사된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청와대 회동’의 여러 배경을 설명하면서 이 같은 얘기를 꺼냈다. 지난 4월 중순부터 물밑 추진됐지만 지지부진하기만 하던 양자 간의 회동이 급물살을 탄 데에는 실제 박 전 대표 측이 탈당 카드 같은 초강수를 둘 수도 있다는 청와대와 당 지도부의 우려감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쇠고기 파동 등의 악재로 이 대통령의 지지율이 추락하는 상황에서 만약 여당마저 ‘조각’난다면 국정을 운영할 동력을 완전히 잃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날 이 대통령과 박 전 대표는 정권 출범 이후 처음으로 단독 회동을 가졌다. 지난 1월 23일 이 대통령의 당선자 시절 만남 이후 100여 일 만의 대면이었다. 두 사람은 웃으며 악수를 나눴지만 회동 결과에 대해서는 서로의 ‘체감지수’가 다른 것 같다는 게 주변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다.
탈당 친박(친 박근혜 전 대표)계 인사들의 복당 문제를 둘러싸고 당 지도부와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던 박 전 대표는 이 대통령과의 회동 이후 일단 ‘탈당’ 등 극한의 방법을 택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박 전 대표가 요구해온 ‘탈당 친박계 인사들의 조기 복당’ 필요성에 대해 이 대통령이 공감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 전 대표는 여전히 ‘일괄 복당’을 주장하고 있는 반면 이 대통령은 ‘당이 절차에 따라 할 일’이라며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지 않아 양자 간의 미묘한 온도차를 드러냈다.
현재 정국 흐름상 박 전 대표가 가진 최대의 무기는 ‘복당 카드’다. 박 전 대표 입장에서는 복당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계속해서 ‘여당 내 야당’의 역할을 할 수도 있고, ‘역공’을 위해 7월 전당대회에 출마할 수도 있으며, 최악의 경우엔 탈당 카드도 꺼내들 수 있다. ‘친이’(친 이명박 대통령) 그룹이 장악한 당 지도부를 압박하는 동시에 당 안팎의 친박계 의원들에게 ‘강한 리더십’을 보여줄 수 있는 카드가 바로 복당 문제인 셈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최근 박 전 대표가 ‘쇠고기 협상’에 대해 정부와 당을 강도 높게 비판하고 나선 것을 ‘복선’이 깔려 있는 상징적 언행으로 보는 시각도 적지 않다. 복당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앞으로 ‘여당 내 야당’의 역할을 하겠다는 강력한 시그널을 보낸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 전 대표로서도 언제까지나 복당 문제만으로 국민들 앞에 나서는 것에 대해 정치적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원칙 있는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고수할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자기 계보만 챙기는 구세대 정치인’으로 비칠 우려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쇠고기 파동’이 박 전 대표에게 하나의 돌파구 역할을 했다는 의견도 있었다. 한나라당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쇠고기 협상에 반대에 가까운 입장을 보이다 정권교체 후 갑작스레 ‘찬성’ 쪽으로 돌변한 상황이다. 이는 박 전 대표가 정치적 자산으로 여기는 ‘원칙’을 어긴 것이고, 박 전 대표 본인이 가장 싫어한다고 국민들에게 소개해온 ‘말 바꾸기·배신’을 범여권이 저지른 셈이다. 이 때문에 박 전 대표는 이례적으로 쇠고기 협상이 잘못됐다고 공개 비판을 가했고, 이 같은 박 전 대표의 행동에 대해 구구한 억측이 나돈 게 사실이다. 여권 주류 세력을 향해 ‘선전포고’를 한 뒤, 차츰 공격수위를 높여나가다 탈당 또는 전당대회 출마라는 수순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관측이 나돈 것이다.
그러나 일단 청와대 회동 이후 탈당에 대한 가능성은 대폭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전당대회 출마 가능성 역시 현저히 낮아졌다는 평이 많다. 박 전 대표 스스로 “복당을 허용해줄 경우 출마하지 않겠다”고 명시적으로 밝혔기 때문이다.
그러나 갈등의 불씨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무조건적으로, 즉각적으로, 일괄적으로’으로 복당해야 한다는 박 전 대표 측의 ‘복당 3원칙’ 중 ‘일괄적으로’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이 대통령이 부정적인 의견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무소속 친박연대 당선자들의 개별 복당은 허용돼도 친박연대의 복당은 허용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당 안팎의 지배적 시각이다.
특히 친박연대는 엄연한 정당이기 때문에 ‘복당’이라기보다는 ‘당 대 당’ 통합을 거쳐야 한나라당 복귀가 가능한 상황이다. 이 때문에 물리적으로 18대 국회 개원 이전에 친박연대가 한나라당과 합칠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박 전 대표 입장에서는 챙겨줘야 할 ‘자식’ 중 절반이 여전히 황야에 남겨져 있는 셈이다. 이 경우 또 다시 박 전 대표가 ‘복당’을 당 지도부에 요구할지는 미지수지만 친박연대의 복당을 놓고도 당 지도부와 박 전 대표 측이 다시 한 번 갈등을 겪을 소지는 남아 있다.
여기에 향후 박 전 대표가 당 운영을 놓고 또 다시 ‘폭발’할 수 있는 중요한 문제가 하나 더 남아 있다. 탈당 인사들이 복귀한 후 당내에서 어떤 대접을 받을지의 문제다. 다음은 친이계 의원들의 시각을 엿볼 수 있는 한나라당 K 의원의 언급이다.
“솔직히 일부 친이 의원들 중에서는 친박계가 탈당 운운할 때 정말 나가기를 은근히 바라는 분위기도 있었다. 153명의 의원이 130명으로 준다 해도 국정 운영에는 사실상 큰 차이가 없다. 어차피 친박 의원들이 나가봤자 정책적으로 뿌리가 같기 때문에 결국 정책 공조는 자연스레 이뤄질 것이다. 반면 친박 의원들이 탈당하게 되면 그만큼 나머지 사람들이 차지할 각종 직책과 발언권은 더욱 세지지 않겠는가.”
실제 친박계 인사들이 18대 개원 이전에 복당할 경우, 국회 상임위 배분이나 당직 인선 등에 있어 기존 당내 인사들이 차지할 몫이 더욱 줄어든다고 할 수 있다. 서청원 친박 연대대표, 홍사덕 의원, 김무성 의원 등 현재 당 바깥에 있는 친박 인사들은 당 복귀시 당 대표, 원내대표를 맡아도 손색이 전혀 없는 중진들이다. 결국 친박 인사들의 복귀시 친이계가 얼마큼 이들에게 ‘파이’를 나눠줄지가 향후 정국 흐름에 주요 변수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한 친박계 당선자는 “현재 논의되고 있는 당 대표, 원내대표, 정책위의장, 사무총장 등 주요 당직 후보들이 온통 친이계 인사들이다. 아예 친박 측은 거론조차 안 되고 있다. 이러고도 국정의 동반자인지 어이가 없을 뿐이다”고 말했다. 복당이 된다 해도 친박계가 또다시 당에서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할 경우 박 전 대표는 어떤 식으로 이들의 불만을 달래줘야 할 입장이다. ‘국정의 동반자’와는 동떨어진 처우가 계속돼 ‘또다시 속았다’는 계파 내 여론이 빗발치면 박 전 대표가 어떤 카드를 꺼내들지 현재로서는 예단하기 힘들어 보인다.
이준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