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심판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정답이 아니다. 박 전 대통령 변호인단은 전원 사임 카드를 만지작거리기만 했을 뿐 실행하진 않았다. 정답은 지난 1996년에 열린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12·12 및 5·18사건 재판이다. 과연 구속된 박 전 대통령의 형사 재판이 어떻게 진행될까. 아무래도 박 전 대통령보다 먼저 구속됐던 두 전직 대통령의 재판 당시와 유사한 모습이 연출될 가능성이 높다. 이미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부터 마치 평행이론처럼 닮아 있기 때문이다.
1996년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재판 당시 모습.
변호인단 구성부터 유사한 부분이 많다. 전두환 씨의 변호인단의 중심은 이양우 변호사다. 당시 언론은 변호인단을 ‘이양우 변호사가 이끄는 연희동 법률캠프 소속 5명의 변호사’라고 표현했다. 전 씨의 백담사 유배 시절부터 연희동 법정대리인으로 구속 수감된 전 씨를 가장 먼저 면회한 것도 이 변호사다. 군법무관으로 준장 예편한 이 변호사는 10, 11대 국회의원을 지낸 ‘군인 출신 정치인 변호사’다. 여기에 대법원 판사 출신 전상석 변호사, 검사 출신 석진강 변호사 등이 합류했다.
박근혜 변호인단도 유사하다. 정치인 출신 유영하, 손범규 변호사를 중심으로 채명성, 정장현, 황성욱, 위재민, 서성건, 이상용, 최근서 변호사 등이 변호인단에 합류했다. 정치인 변호사들을 중심으로 검사 출신 변호사들이 합류한 것.
‘정권의 집요한 정치적 압력과 편파적인 여론이 극에 달해 변호인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나와 아무런 인연이 없던 전상석 전 대법관이 변호를 자청했다. 이양우 석진강 조재석 정주교 변호사가 나의 변호인으로 선임된 것은 재판이 열리기 불과 한 달 전이다.’
‘전두환 회고록’ 3권 황야에 서다.
재판을 불과 한 달 앞두고 변호인단을 선임했다는 얘기도 사실과 다르다. 전 변호사와 석 변호사가 전 씨 변호인으로 선임된 것은 1995년 12월로 구속 수감 직후였고 이를 주도한 게 이 변호사다. 1996년 1월 전 씨 측이 헌재에 검사의 공소권행사에 대한 헌법소원 심판청구를 할 당시에도 이 세 변호가가 법적 대리인이었다. 재판이 1996년 3월에 시작됐으니 한 달 전이 아닌 서너 달 전인 구속 직후 변호사 선임이 이뤄졌다.
재판은 1996년 3월 11일에 시작됐다. 전 씨는 회고록에서 그날 전 변호사의 모두변론을 ‘변론이라기보다 차라리 역사바로세우기의 반역사성, 5·18특별법의 위헌성, 5·18재판의 부당성을 신랄하게 지적하고 질타하는 준열한 논고였다’고 평가했다. 모두변론이 법정을 숙연케 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반면 법정을 숙연케 했다는 ‘모두변론’을 <한겨레> 사설은 ‘변호인단은 이러한 국민들의 정서와는 너무 동떨어지게도 5공의 정통성을 옹호하고, 12·12 군사반란과 5·18 대란 혐의에 대해 무죄를 강변해서 국민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고 평했다.
점차 삐걱대기 시작한 재판은 5월 20일 8차 공판에서 벌어진 ‘변호인 4명 집단 퇴정’ 사태로 이어졌다. 전 씨는 회고록에서 ‘검사의 망언’ ‘검찰의 무책임한 태도’ ‘거부당한 TV 생중계 요청’ ‘강행된 야간 재판’ 등을 그 원인으로 지목했다. 다음은 회고록 내용이다.
‘석진강 변호사는 고혈압 증세로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퇴정하겠다면서 재판정에게 호소하듯 발언을 이어갔다. 결국 김영일 재판장의 일방적인 소송 진행에 항의하며 전상석, 석진강, 조재석 변호인이 퇴정했다. 법정에 혼자 남아 있던 이양우 변호인도 체력에 한계가 와서 더 이상 신문을 할 수 없다면서 자리에 앉았다. 변호인 4명이 집단 퇴정했지만 재판장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중략)’
변호인 집단 퇴정에 대해 당시 검찰은 “실익 없는 논쟁 유발로 재판을 지연시키려는 술책”이라고 비난했다. 그날 상황에 대해 <매일경제>는 ‘예상대로 노골적인 재판지연 전략을 구사했다. 구속만기기간이 끝날 때까지 공판을 지연시키다가 선고공판은 불구속 상태에서 받도록 하겠다는 변호인단의 작전은 진작부터 예측된 상태’라고 보도했다. 게다가 8차 공판은 전 씨 변호인단의 시간 끌기도 논란이 됐다. <경향신문>은 ‘변호인 소걸음신문’이라는 기사에서 ‘필리버스터링이 법정에서도 일어난다면? 첫 변호인 반대신문이 열린 이날 전두환 전 대통령의 변호인 측은 그야말로 소걸음식 신문으로 일관했다’고 비판했다.
6월 13일 13차 공판에서도 전 씨 변호인 전원 퇴장 사퇴가 벌어졌다. 전 씨는 회고록에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변호인단이 신속한 재판보다 실체적 진실규명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역설하며 주 2회 공판은 무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항의의 표시로 전상석 석진강 변호사는 불참하고 이양우 변호사 혼자 참석했다. 이양우 역시 변론 준비가 안 되어 더 이상 재판에 응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10시 30분경에 퇴장했다. 변호인 전원 퇴장이라는 사법 역사에 흔치 않은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20차 공판에서는 전 씨와 노 씨가 재판을 거부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이번에도 언론은 이를 전 씨 변호인단의 시간 끌기로 규정했다. <동아일보>는 ‘13차 공판에서 주2회 공판 강행을 둘러싼 격론 끝에 신문 거부하고 퇴정했다. 재판부는 심리를 지연시켜 구속 피고인들을 석방시켜 보려는 공판전략에 따른 것’이라 지적했다. 심지어 <한겨레>는 사설을 통해 ‘변호인단이 사퇴하면 재판부의 직권으로 국선변호인을 선임해서 재판부의 일정에 따라 공판을 진행해야 한다. 피고인들과 변호인단은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신속한 재판과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스스로 포기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7월 4일 19차 공판에서 전 씨 변호인단은 변호인단 전원 사퇴라는 초강수를 뒀다. 전 씨는 회고록에서 당시 상황을 ‘갈수록 더해가는 재판부의 편파 진행 하에서는 더 이상 변호다운 변호를 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변호인단 전원은 재판부에 사임계를 제출했다’고 주장했다. 결국 재판부가 국선변호인을 선임하자 전 씨는 ‘공소장을 읽어보지도 못한 국선변호인’이라고 반발했다.
당시 <경향신문>은 ‘국선변호사들이 수일 전 재판부로부터 혹시 국선변호인으로 선임될지 모르니 준비하고 있으라는 연락을 받았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전 씨의 말처럼 ‘공소장을 읽어보지도 못한 국선변호인’이 아닌 어느 정도의 준비는 돼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7월 8일 20차 공판에선 전 씨와 노 씨, 두 전직 대통령이 재판을 거부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된다. 전 씨는 회고록은 ‘변호인들은 재판장이 유죄를 예단하고 재판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변호인을 사임함과 동시에 법정을 떠났다. 전상석 변호사는 퇴정에 앞서 19차 공판에서 있었던 국선변호인 선임 과정에 대해 김영일 재판장을 질타했다’고 당시를 설명했다.
그렇지만 당시 매스컴은 ‘국민 우롱하는 변론 거부’ ‘파행 치닫는 12·12, 5·18공판’ ‘파행으로 치닫는 역사재판’ 등 표현으로 전 씨와 변호인을 비난했다. <동아일보>는 기사를 통해 ‘전두환 노태우 피고인의 변호인 8명이 1심 선고를 한 달가량 앞두고 8일 변호인 선임을 전격사퇴한 데는 무엇보다도 재판의 공정성에 타격을 주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변호인 사퇴에 이어 전 씨와 노 씨가 국선변호인 선임마저 거부하고 이날 오후부터 법정에 출두하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풀이된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파행을 거듭한 1심 재판은 전 씨에게 사형, 노 씨에게 징역 22년을 선고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2심에서 각각 무기징역과 징역 17년으로 형량이 줄었고 결국 대법원에서 무기징역과 징역 17년이 확정됐다.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나오자 이양우 변호사는 “역사가 모든 것을 가리지 않겠나”라며 대법원의 판결을 거부하는 입장을 보인 뒤 “대법원 판결이 그렇지 뭐!”라는 냉소적인 한마디를 남겼다.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