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일요신문] 대선이 끝났다. 이번 대선을 장미대선이라고들 했지만 장밋빛 미래의 청사진은 좀체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필자의 눈에는 그랬다. 헌정사상 유례없던 대통령 파면사태로 실시된 선거여서인지 여느 때보다 국민의 관심을 모았다. 그 관심 속에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정치에 대한 실낱같은 소망이 자리하고 있었을 듯싶다. 어쩌면 허영심만 가득했던 낡고 못난 정치를 넘어 진화한 정치로 가는 여정의 시작이기를 갈망했으리라 생각한다. 참을 수 없는 목마름을 적시는 한 줄기 단비가 되기를 간절히 빌면서.
이쯤에서 이번 대선을 한마디로 평가해보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절반의 성공이다. 비록 성공이라 했지만 그리 썩 내키지는 않는다. 차라리 실패에 가깝다고 하는 게 옳을지도 모르겠다. 권력정치를 향한 집착 같은 열정을 불태우던 몇몇 정당과 후보들을 보면 과거와 달라진 점이라곤 없었으니 말이다. 대선을 왜 했는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국민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전혀 읽지 못했다. 이렇게 얘기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좀 더 긴 얘기는 다음으로 미루었으면 한다. 장미대선을 제대로 읽어야 한다. 어떤 의미의 선거였고 또 어떠한 장이 마련됐어야 하는지를 안다면 그 평가는 자명하리라 생각한다. 그러자면 우선 그 대선실시의 원인이었던 국정농단사건과 탄핵, 촛불의 의미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주변에서 국정농단사건을 어떻게 봐야하느냐고 자주 묻곤 했다. 지금도 가끔 그런 질문을 받는다. 그러면 필자는 ‘최순실 등의 국정농단사건’이 아니라, 동서고금에 찾아보기 힘든 국기문란사건이라고 답한다. 통치자의 손으로 국가의 기반, 통치의 기반을 뒤흔든 역사적 사건이다. 다시 말해 특정인의 부정부패 사건을 넘어 총체적 난국을 일으킨 사건이고 미국보다 먼저 연 여성대통령 시대를 ‘실패’로 종결시킨 희대의 사건이다. 한 사람을 향해 광신도 같은 ‘묻지 마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이 이 소리를 들으면 득달같이 달려들겠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의 몇 차례 담화문을 보면서 오히려 가슴이 답답했던 국민이 한 둘이 아닐 테다. 청렴하게 했다는 것과 몰랐다는 것 외에 달리 기억나는 말은 없다. 그 말을 믿더라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당시의 비판과 문제제기는 대통령 ‘박근혜’가 아니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당사자는 물론 비호세력들이 대통령직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미국의 정치학자 리처드 뉴스타트는 대통령의 권력은 설득력, 직업적 평판, 대중적 신망에서 나온다고 했다. 이 기준을 놓고 보더라도 국정농단사건에 대한 해명이나 반론은 뭐하나 충족되는 게 없다. 필자가 늘 하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도둑질이 나쁘다는 것을 아는 도둑과 모르는 도둑, 둘 중 누가 더 나쁘냐고. 한결같이 아는 게 더 나쁘다고 답한다. 실은 모르는 게 더 나쁘다. 이유는 간단하다. 아는 도둑은 나쁘니 하지 말라고 하면 되지만, 모르는 도둑은 그 얘기를 하기 전에 도둑질이 나쁘다는 걸 먼저 이해시켜야 하는 까닭이다.
탄핵은 또 어떤가. 촛불 반대편에서 태극기 물결이 탄핵의 부당성을 목 놓아 외쳐댔다. 왜 저럴까 했다. 13년 전 의사당 본회의장을 울렸던 애국가도 마찬가지지만 태극기는 그런 곳에 쓰라고 있는 게 아닌데 말이다. 어느 탄핵 반대 집회에 참석했던 모 대학 교수가 이런 얘기를 했다. 탄핵은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언뜻 들으면 맞는 소리 같다. 하지만 필자는 통치행위를 재단할 수 있는 법률이 어디에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무슨 말인고 하면 통치행위를 재단할 수 있는 법은 민의라는 뜻이다. 탄핵은 단순히 무슨 법률 몇 조 몇 항을 위반했는지를 묻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통치행위가 정당했는지, 권력을 정의롭게 사용했는지를 묻는 것이다. 대통령이라고 치외민의의 영역에 두려하거나 헌재의 판결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 법치를 훼손하는 것이다.
또 하나 민주주의라고 했다. 민주주의가 무엇일까를 다시 생각했다. 헌법이 부여한 국민의 정당한 권리를 행사한 것이 왜 민주주의 가치를 무너뜨리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길이 없었다. 대의제는 권력의 위임을 의미하는 것이지 국민의 정치주체성을 박탈하거나 정치의 중심에서 몰아내는 것이 아니다. 국민을 정치의 주변으로 위치지우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탄핵은 노 전 대통령 때와는 다르다. 그때는 정치권이 주도하고 국민이 반응했다면, 이번엔 국민이 직접 나섰고 정치권이 대응했다고 봐야한다. 그리고 한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기득권을 향유했던 보수 세력 전체에 대한 탄핵인지도 모른다. 과연 보수가 나라와 국민, 변화와 미래를 위한 통치의 자질과 역량을 지니고 있는가에 대한 회의적인 물음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탄핵의 부당성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서 막무가내로 언성만 높였다. 삭막했던 20세기 정치의 울림 없는 목소리만 남을 뿐이다.
기왕 한 가지만 더 얘기하자. 필자가 굳이 지나간 탄핵을 다시 들추는 이유는 그 탄핵이 초래하고 또 초래할 결과 때문이다. 탄핵 당시 필자는 세 가지를 얘기한 적이 있다. 박 전 대통령의 정치생명의 끝과 ‘朴 family’에 대한 혹독한 역사적 평가의 도래, 새누리당과 보수세력의 분열과 약화, 진보 또는 제3세력에 의한 향후 10년간의 정권교체였다. 분명히 말하지만 보수가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면 재집권은 요원한 일이 될지도 모른다.
이제 그들이 깎아내린 촛불을 읽어보자. 단언컨대 촛불은 횃불이 아니었다. 촛불은 민심의 바다에서 미래를 향해 비추는 등대의 불빛이다. 때문에 그 촛불은 못된 짓을 한 특정인에 대한 항거라기보다는 정부수립 이후 70년 동안(10년간의 정권교체기가 있었지만) 유지돼 온 보수지배 하에서의 통치시스템과 국가시스템 전체에 대한 절망과 불신의 발현이라고 봐야한다. 이게 촛불의 의미다. 그러면 그 촛불에 담긴 국민의 ‘뜻’은 무엇일까? 바로 통합과 개혁, 그리고 미래다. 과감한 체제와 사회개혁,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비롯해 국가시스템의 과감한 변화에 대한 요구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48년 체제’를 극복하고 진정한 통합의 시대로 나아가기를 염원하는 간절함이다. 또 부디 20세기 정치에서 21세기 정치로 진화해 번영과 행복의 새 시대를 열라는 명이다. 이런 촛불이 횃불이라니 누가 들어도 참 기가 막힐 일이다.
국정농단사건, 탄핵, 촛불 이 세 가지를 제대로 봐야 장미대선을 바르게 읽을 수 있다. 장미대선의 이상과 현실은 무엇인지, 왜 장미대선을 절반의 성공과 실패라고 평가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듯싶다. 굳이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 세 가지를 권력정치에 맛 들린 사람들이 선거에 활용하는 게 사뭇 못마땅했다. 볼 성 사나운 아집과 편향성만 드러내면서도 당당할 만큼 표를 달라고 했으니 말이다. 하기야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대선 이후에 ‘국민의 뜻을 겸허히 받들겠습니다’라는 현수막을 본 적이 있다. 정말 그 뜻이 뭔지를 알기는 아는 것일까.
* 이지상 / 연세대 정치학 석사
경북대 정치학 박사과정 수료
전 국회의원 보좌관
현 경북대 사회과학연구원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