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일요신문] 지난 번 글을 읽지 못한 독자들도 있겠다. 장미대선을 평가하면서 당시 4명의 후보들을 차례로 이야기하고 있다. 제목처럼 대선을 평가한 까닭이야 필자가 설명하지만 이해와 판단은 독자들의 몫이다. 문 후보와 안 후보는 이야기했으니, 이제 다른 후보 두 후보를 만날 차례다. 실은 진정으로 다루고 싶었던 두 사람이다. 다만 전혀 다른 시선에서.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 차라리 출전하지 말았어야 할 후보다. 부끄러울 만큼 유치한 말장난도 모자라 대선을 이데올로기 전쟁터로 만들었다. 그뿐인가. 실패한 보수를 재건했다는 자만 섞인 품평을 쏟아내기까지 했다. 대구경북을 썩고 낡은 수구세력의 보루로 만들어놓고 가당키나 한가 말이다. 하소연 할 데 없이 혼자 속앓이 하는 520만 시·도민은 어쩌고. 거기에 동조한 자유한국당도 도긴개긴이다.
자유한국당이 홍 후보를 내세운 건 시대착오이며, 권력정치에 함몰된 구태의 연장선에 불과했다. 국정농단사건과 탄핵, 촛불의 의미를 모르니, 모든 게 조작되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권력욕망만 불태웠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면서 이승만 3선 개헌 당시가 떠오른 적도 있다. 도대체 국민은 어디에 있고 나라는 어디에 있는가 말이다. 대권이 뭐 길래 저리도 미쳐 날뛰는가 싶다. 이뿐인가. 자유한국당은 심각한 표정으로 국민을 향해 쇄신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식당 간판만 바꿔달았을 뿐 아무 것도 한 게 없다. 돈독 오른 주인, 불친절한 종업원, 못 믿을 음식, 냄새나는 내부인테리어 등은 그대로다. 한 번 맛본 손님 중에 다시 올 사람은 없다.
더 기막힌 일은 스스로가 배신자들이면서 남에게 삿대질을 해댄 거다. 박근혜를 진짜 배신한 사람은 자신의 공천권에 혈안이 된 기회주의 친박(模朴)들이다. 조원진 후보와 새누리당의 재등장으로 위록지마(謂鹿止馬)하던 자유한국당의 본모습이 드러났다. 물어보자. 부당한 탄핵의 진실을 밝히겠다면서 도대체 간판은 왜 바꿔달았는가? 누굴 위해서, 무엇 때문에, 뭘 얻으려고. 그들 주장대로 박 전 대통령이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거라면 새누리당 간판을 더 당당하게 들고 있어야 했다.
옳지 않은 것을 옳지 않다고 한 게 배신이면, 못된 짓을 잘했다고 하는 게 충성이란 말인가. 그건 야바위꾼들이나 하는 아첨이다. 간판 바꾼 것, 그게 오리지널 배신행위다. 오해 없기를 바란다. 여기서 배신은 박 전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에 대한 것이니. 하나만 더 물어보자. 의회의 존재이유를 아는가? 집권여당이라고 무조건 대통령에게 복종하고 충성해야 한다면 굳이 의회는 필요 없다. 국회의원은 대통령의 심복이 아니라 국민의 종이니까. 대통령에겐 참모가 돼야 하고 국민에겐 비서가 돼야 한다. ‘참모는 한 걸음 앞서나가야 하고, 채찍을 들 줄도 알아야 한다.’의 뜻을 되새기기를 충심으로 바란다.
자유한국당이 후보를 내는 순간 대선은 이미 반 토막 났다. 온전한 성공은 불가능해졌다는 얘기다. 따라서 자기성찰과 쇄신 후에 도전장을 내밀었어야 옳다. 기왕에 내려면 자질과 역량을 갖춘 후보를 내세웠어야 한다. 초등생이나 따라 할 유행어만 만드는 그런 후보 말고. 심 후보 얘기대로 세탁기가 고장이 나긴 한 모양이다. 필자는 탄핵당시부터 보수의 종말을 예견한 바 있다. 자유한국당은 대선 이후 당권을 둘러싼 갈등과 대립의 심화로 재기불능상태가 될 것이라고 했다.
필자는 한나라당 시절부터 꽤 오래 국회 밥을 먹었다. 하지만 이번 대선을 지켜보면서 자유한국당과 홍준표식 보수를 쓰레기통 속으로 던져버렸다. 미련 둘 것도, 아쉬워할 것도, 기대할 것도 없다. 훌훌 털어버리면 그만이다. 차라리 그게 속 편하다. 그들이 개과천선한다면 모를까. 대선 이후의 행태를 보면 그것조차 공염불일 듯싶다. 마지막 승복발언을 하던 홍 후보의 표정에서 이미 드러났다. 뭐가 불만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하면 정말 집권의 기적이 일어날 줄 알았단 말인가. 중병도 이런 중병이 없다. 知彼知己 勝乃不殆 知地知天 勝乃可全이다.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 그래도 성공이란 평가를 가능케 했던 후보다. 필자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본 후보기도 하다. 기존의 보수와는 다른 새로운 정치세력의 등장이란 기대감을 품게 했다. 유 후보하면 떠오르는 건 개혁보수론이다. 맞다. 보수는 개혁돼야 한다. 꽂아 둔 깃대만으로 표를 달라는 건 정치도의가 아니다. 국민이 갈망했던 건 유 후보의 말대로 따뜻한 보수, 정의로운 보수, 공동체를 살리는 보수였다. 니편 내편 갈라 싸우는 대한민국이 아니라 참으로 하나가 되는 대한민국이다. 그러자면 보수는 수구에서 벗어나야 한다. 좌우이념 하에서 표만 따지는 덧셈이 아니라 기대와 가치를 녹여내는 곱셈의 정치세력이 돼야 한다. 이번 장미대선은 그 희망의 싹을 보았다는 점에서 가히 성공이라 할 만하다. 이제 뭔가 민심의 바다 밑을 흐르는 변화의 기운을 느낄 수가 있다. 때 늦은 감은 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바른정당도 별 수 없지 않느냐는 말들을 한다. 한 자리 수 득표율을 말하는 모양이다. 아쉬움도 남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때로는 단 1%의 가능성에 모든 것을 걸기도 한다. 도박이 아니다. 새로운 가치와 비전을 가진 세력, 정치를 아는 정치세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런데도 좀 더 나은 결과를 만들지 못한 이유는 뭘까? 무엇보다 개혁보수의 정체성이 모호했던 탓이다. 국민에게 어떤 보수인지, 지향가치는 무엇인지, 보수를 왜 개혁해야 하는지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특히, 유 후보의 이미지와 정통보수의 이미지는 상충되는데도 신(新)보수의 이미지를 확장시키지 못했다.
그 까닭은 스스로를 ‘보수적통’과 ‘배신자’ 프레임에 가두었기 때문이다. 보수 자체에 혐오를 느끼는 국민에게 보수적통 논란은 이율배반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홍 후보와 진흙탕 싸움을 하는 게 아니었다. 굳이 그런 후보와 뒤섞일 일이 뭐가 있는가 말이다. 그럴수록 싫든 좋든 문 후보와 홍 후보를 돕는 격인데. 우리 국민은 제대로 된 보수를 가져본 적이 없다. 기억에 남는 건 탐욕스런 기회주의 세력뿐이다. 그 적자임을 내세우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다퉈봤자 덕 될 게 하나도 없다는 얘기다. 배신자도 마찬가지다. 진짜 배신자들을 두고도 ‘우리가 남이가’ 하는 곳에서, 아니라고 해봐야 누가 귀 기울여 들어주기나 하는가. 이길 수도 없고 말아야 할 싸움을 한 셈이다.
보수 대개혁의 기치를 내 건 바른정당이 뿌리를 내릴 곳은 대한민국이다. 대구경북이 아니다. 그런데도 스스로를 지역의 한계 속에 가두었으니 기존 보수와 차이가 없어져 버렸다. 급기야 개혁의 동력은 약해져 버리고 지지세는 답보상태에 머물게 되었다. 그래서 필자는 틈새 대응전략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공성(攻城)은 하수(下手)의 전략이다. 지난 대선은 유 후보와 바른정당의 독자세력화를 위한 첫 시험무대였다. 그런 만큼 안에서 깨지 말고 밖에서 깨고 들어왔으면 했다.
현실적인 관점에서 연안(聯安) 이문(離文) 입홍(入洪)전략을 선택하기를 바랐다. 안 후보와는 연대를 통해 확장된 보수세를 강화하고, 문 후보와는 거리를 두는 것이다. 그리고 홍 후보와는 직접 다투기보다는 보수의 주변세력을 흡수하는 것이다. 유 후보가 힘든 길을 선택한 이상 연대는 무의미해졌지만 명분이 없지는 않았다. 꼼수도 아니고 기회주의도 아니다. 고뇌가 묻어나던 물음이 생각난다. 자신들의 가치를 지키는 길이 무엇이냐는. 이렇게 답했다. 존재하지 못하는데 가치가 다 무슨 소용이냐고.
희망은 있다. 바른정당이 갈 길은 정해져 있다. 세 가지다. 단기목표는 이루었다. 대선에서의 존재감의 각인이었는데 싹을 틔웠으니 됐다. 중기목표는 내년 지방선거와 21대 총선에서 유의미한 의석수를 확보하는 거다. 그리고 장기목표는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보수만 고집할 일이 아니다. 중도와 진보까지도 아우를 수 있는 통합성과 개방성, 확장성을 가져야 한다. 지금 이 시대가 원하는 건 새로운 ‘보수’가 아니라 새로운 ‘대안’이니까. 불가능하지 않다. 왜 정치를 하는가를 자문하는 깨어있는 사람들이 있는 한 말이다. 어느 네티즌의 말이다. “눈물납니다. 우리나라에 이런 정치인이 있다는 게 다행입니다.” 다른 말이 뭐가 필요할까, 그저 가슴이 뭉클해진다.
참 긴 글을 썼다. 대선은 끝나지 않았다. ‘대선 이후’가 남아있다. 새로운 정부가 성공하고, 바른정당과 국민의당이 기존 정치와는 다른 정치를 보여준다면 장미대선은 완성된 성공으로 기록되리라 믿는다. 글을 쓴 이후로 주변에서 진보냐 보수냐를 자주 물어온다. 현재의 이념그룹이라면 양쪽 다 아니라고 하면서 웃고 만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보다. 아직도...
* 이지상 / 연세대 정치학 석사
경북대 정치학 박사과정 수료
전 국회의원 보좌관
현 경북대 사회과학연구원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