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기술이라고 본인이 자부하는데 이 기술로 뭘 만들어내는 겁니까?”
내가 여성변호사에게 물었다.
“모르겠어요, 설명할 수 없어요.”
“경험 있는 기업가가 백억을 투자한 걸 보면 이 기술이 대박을 터뜨린다고 보았기 때문에 돈을 준 것 아니겠어요? 어떤 경우에 대박이 터집니까?”
“그것도 모르겠는데요.”
“수사기관의 입장에서 볼 때 천문학적 숫자인 백억원이라는 돈을 줬는데 그 기술에 대해 납득을 하지 못한다면 당연히 사기죄라는 심증을 가지지 않을까요?”
과학자도 글을 잘 써야 한다. 미국의 록펠러 대학은 ‘시인의 경지에 오른 과학자’상이라는 게 있다고 한다. 과학분야에서 탁월한 글솜씨를 발휘한 저자에게 주는 상이라고 한다. 아인슈타인도 글을 잘 썼다. 미국의 의대시험에서도 에세이를 중요시한다.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글쓰기 프로그램을 운영한 낸시 소머스 교수는 “어느 분야에서든 진정한 프로가 되려면 글쓰기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했다. 변호사에게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해박한 법적지식은 이미 판사가 가지고 있다. 재판의 본질은 판사를 설득하는 일이다. 그건 말이 아니라 법원에 써내는 글로 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있었던 사실이나 한 인간의 삶을 문장에 녹여 생생한 모습으로 판사 책상위에 놓아야 한다. 대부분의 선배 변호사들이 논문이라는 형식에 익숙했다. 법률교과서 자체가 체계와 논리 그 자체인 논문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법정에 끌려온 인간들과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논리가 아니었다. 판례라는 논리적인 지식으로 그들을 스크린해서 보면 진실 그 자체를 보는 게 아니었다. 지난 30년 동안 변호사를 하면서 재판부에 보내는 글을 써 왔다. 학자의 논문 보다는 생생한 소설형식으로 썼다. 소설형식이라고 해도 방식만 그럴 뿐 허구나 과장이 라는 불순물이 담기면 안 되는 것이었다. 요즈음 장르로 치면 ‘팩션’이라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구체적 사실을 소설형식으로 쓰는 것이다. 논문에 익숙한 판사들이 더러 “뭐 이래?”하면서도 의외로 설득력이 강한 경우가 많았다. 부드럽고 섬세한 표현은 자기도 모르게 물에 젖듯 상대방의 감정을 이끌어 내는 것 같았다. 내가 상담을 온 과학자의 부인에게 말했다. 그녀 역시 대학교수였다.
“남편이 평생 연구한 기술이 세계적인 것이라고 자부하신다면 판사도 보고 투자를 할 마음이 들도록 그 기술을 글로 표현할 수 있는 변호사를 고용하세요. 그게 최고의 변론이 아닐까요?”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