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대중 전 대통령의 미국 망명 시절 이희호 여사는 외신기자 두 명으로부터 비밀리에 남편 소식을 대신 전해 들었다고. 사진은 <동행>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김 전 대통령 내외.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
이 책에는 이 여사가 1962년 5월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결혼 이후 지난 1997년 김 전 대통령이 4수 끝에 대통령에 당선되기까지 함께한 인고의 세월이 녹아 있다. 또한 결혼 전 사회운동가로 활동하며 특히 여성의 인권 신장 운동에 앞장섰던 ‘자연인’ 이희호에 대한 회고도 담겨 있다. 그가 그동안 미처 털어놓지 못했던 인생사와 정치적 사건 뒤안길의 이야기들을 <동행>에서 간추려 보았다.
이희호 여사는 이화고와 이화여전을 거쳐 1946년 9월 서울대 영문과에 입학해 3학년 때 교육학과로 옮겼다. 그는 자신이 학구파라기보다는 학도호국단에 들어가 집회 행진을 할 때면 언제나 선두에서 지휘를 하고 연극에 심취했던 학생이었다고 말했다. 연극에서도 남녀 배역을 가리지 않고 했는데 <이수일과 심순애>에서 ‘이수일’ 역을 맡아 활약을 한 적도 있었다는 것.
이희호 여사의 학창 시절 별명은 독일어로 중성을 뜻하는 ‘다스’(das). 뿌리 깊은 가부장제와 남존여비 사상과 맞부딪쳐 여성의 권익신장을 위해 노력했던 그의 모습을 보여주는 별명이기도 하다.
여성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이 여사는 유독 ‘그녀’라는 말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다고 밝혔다. 그는 “‘그남’은 없는데 ‘그녀’라는 말이 생긴 것은 일본어 ‘가노조’에서 온 일제 문화의 잔재”라며 “한때 우리말 속에 은연중에 자리 잡은 남성들의 터무니없는 우월의식과 언사를 연구해 책을 내려고 한 적도 있다”고 밝혔다.
이 여사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결혼하기 이전 재야운동가 계훈제 씨와의 결혼을 생각했었다는 사연도 털어놓았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난 이후 부산 피란 시절의 일이었다. 당시 사회운동에 관심 있는 대학생들의 모임이었던 면학동지회(이후 ‘면우회’로 명칭을 바꿈) 멤버를 통해 서울대 정치학과 학생위원장이자 학생운동의 기수였던 계훈제 씨를 소개받았다고 한다. 그는 계 씨에 대해 “나는 그가 추구하는 꿈에 끌렸다. 갓 해방된 조국을 뜨겁게 사랑한 청춘으로서 굳이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더라도 동지적 결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결국 폐결핵에 걸린 계 씨를 남겨두고 미국 유학길을 선택했고 그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은 오랫동안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여사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1962년 5월 10일 결혼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그보다 10여 년 전인 1951년 피란지 부산에서였다. 당시 지인의 소개로 인사를 나누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첫인상에 대해 이 여사는 “20대 중반의 잘생긴 멋쟁이로 사업 근거지를 고향인 목포에서 임시 수도 부산으로 옮겨와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다”고 기술했다. 당시 그는 계훈제 씨와 유학 사이에서 고민하고 방황하고 있었다. 결국 미국 유학을 선택했고 6년 뒤인 1959년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김 전 대통령과 우연히 재회하게 된다.
그리고 이듬 해 6월경 김 전 대통령이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다는 기사와 함께 부인과 사별했다는 소식을 신문을 통해 알게 되었다고 한다. 1961년 김대중 전 대통령은 5수 만에 국회의원에 당선됐지만 5·16 쿠데타로 인해 정치인생은 순탄치 않은 길로 들어서게 된다. 민주당 대변인으로 활약했던 전력 때문에 부패와 용공 혐의로 조사를 받게 된 것. 그러던 어느 날 핼쑥한 모습으로 이 여사를 찾아온 김 전 대통령은 조심스럽게 청혼을 했다고.
이 여사는 그 순간에 대해 “그에게 정치가 꿈을 이루는 길이며 존재이유였다면 나에게는 남녀평등의 조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길 중의 하나였다. 남녀 간의 뜨거운 사랑보다는 서로가 공유한 꿈에 대한 신뢰가 그와 나를 동여맨 끈이 되었다”고 회고했다. 이 여사는 “내가 결혼한 후 그분도 혼인하여 아들을 두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비로소 홀가분해졌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나중에 청와대 안주인 시절 계 씨의 타계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끝내 ‘말없이 떠나서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아있다”고 밝혔다.
▲ 12일 열린 <동행> 출판기념회에서 이희호 여사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 ||
또 김 전 대통령의 미국 망명 시절 한국에서 전혀 소식을 들을 수 없었을 때엔 외신기자 두 명이 소식을 전해주었었다는 이야기도 밝혔다. 이 여사는 당시 공중전화와 ‘스미요시’라는 가명을 이용하는가 하면 마치 007 첩보작전과 같이 비밀리에 차를 바꿔 타고 이들과 소식을 주고받았었다고.
청주교도소에 무기수로 수감돼 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면회 가던 1982년 2월 초. 이 여사는 청와대 정무수석이던 허화평 씨로부터 전화를 받게 된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온 것. 얼마 뒤 전 대통령과 두 시간여 독대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경호원들이 대통령을 만나기 전 ‘반지를 빼라’고 해서 의아했다고. 금속을 사전에 모두 제거해야 한다는 경호 원칙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 여사는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해 스스럼이 없고 사형을 시키려 했던 ‘수괴’의 안사람을 상대로 동네 복덕방 아저씨가 아주머니 대하듯이 일상적으로 대했다고 밝혔다. “때로는 바지 자락을 올리고 다리를 긁적거리면서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독특한 분이었다”는 것이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 이 여사는 전 대통령을 만나고 온 뒤 삼일절 특별사면을 고대했으나 20년 감형으로 만족해야 했다고 한다. 그는 “나도 엎드려 간청하며 매달렸더라면 더 감형이 되었을까. 그러나 남편이나 나나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죽으면 죽었지, 할 수 없는 굴종이었던 것”이라고 씁쓸히 회고하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국민의 정부’ 시절 김대중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들을 자주 초청했는데 대통령 테이블에서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배우자 테이블에서는 이순자 여사가 화제를 유쾌하게 이끌었다고 한다. 이 여사는 책에서 “우리는 둘째 홍업이의 결혼 문제로 그에게 빚을 졌다. 언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날지, 사람의 일은 정말 알 수가 없다”고 설명했다.
홍업 씨는 김 전 대통령의 미국 체류 시절인 1984년 3월 미국 메릴랜드 성당에서 신선련 씨와 결혼했다. 신 씨는 5공 시절 청와대 사정비서관과 감사위원을 지냈던 신현수 씨의 딸이었다. 당시 결혼식 일주일쯤 뒤 사돈인 신현수 씨 내외가 미국에 와 이 여사가 놀란 적이 있다고 한다.
신 씨가 전한 사연인즉 ‘결혼 기사가 국내 신문에 실리자 후임 사정비서관이 사표를 종용했다는 것. 각오했던 일이라 사표를 내니 전두환 대통령이 연유를 물어보더라는 것이다. 사실대로 말했더니 전 대통령은 “자식 일은 마음대로 안 된다”라며 사표를 반려하고 오히려 늦었지만 가서 축하해주라고 휴가까지 주었다는 것이었다. 당시 이 여사는 전 전 대통령이 허물도 많이 있지만 흔쾌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조성아 기자 lilychic@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