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혜영 원내대표(왼쪽)와 정세균 대표. | ||
“이대로 가면 민주당의 미래는 없다.”
11월 20일 기자와 만난 민주당의 한 초선의원이 화두로 꺼낸 얘기다. 이 의원은 “여권이 극심한 내우외환을 겪으면서 총체적 위기에 직면했는데도 제1 야당인 민주당의 지지율은 정체를 면치 못하고 있다”며 “특단의 조치나 해결책을 강구하지 않는다면 민주당은 ‘식물정당’으로 추락하고 말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지율 정체와 인물난, 야성 상실 등 각종 악재로 표류하고 있는 민주당의 현주소가 적나라하게 반영된 발언으로 해석된다.
정치 분석가들은 민주당의 표류가 장기화되고 있는 주된 요인으로 정체성 혼란을 꼽고 있다.
민주당 안팎에서는 민감한 현안에 대한 대안 부재와 ‘김민석 파동’으로 여론을 악화시키고 있는 정세균 대표와 당 지도부를 겨냥한 쓴소리가 쏟아지고 있다.
민주당 내 60세 이상 의원 15명으로 구성된 ‘민주 시니어’ 모임은 11월 17일 국회에서 창립총회를 갖고 당 운영에 의견을 적극 개진키로 뜻을 모았다. 특히 이날 창립총회 모임은 민주당의 위기 상황을 반영한 듯 당 지도부에 대한 성토의 장이 됐다.
모임의 간사를 맡은 김성순 의원은 “당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다. 이대로 가면 참으로 어렵지 않겠느냐”고 지적했고, 강봉균 의원은 “반성과 대안이 없다”고 비판했다. 문희상 의원은 “당의 진로와 방향에 대해 답답한 심정”이라고 토로한 뒤 “김민석 최고위원 건도 시차를 두고 하는 현명한 방법이 없었을까”라며 ‘김민석 구하기’에 ‘올인’한 지도부의 전략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민주당 개혁 성향 모임인 ‘민주연대’의 움직임도 계파 갈등을 부추기는 뇌관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이 모임에는 천정배 의원을 비롯해 민주당 현역 의원 15명과 김근태 전 의원을 중심으로 한 전직 의원 36명이 소속돼 있다. 민주연대는 당 지도부가 현안 대응을 제대로 못한다는 데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민주연대는 조만간 대표를 선임할 예정인데 김근태 전 의원과 천정배 의원을 공동대표로 하는 방안과 이 두 사람은 고문으로 두고 새로운 인물을 대표로 선출하는 방안을 놓고 고민하고 있다. 또 12월 2일로 예정된 창립대회 메시지에는 당 지도부를 겨냥한 비판과 당 정체성 문제를 함께 제기할 것으로 보여 계파 갈등을 부추기는 새로운 뇌관이 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민주당 서울지역 낙선자들이 의기투합해 새로운 ‘활로찾기’에 나선 것도 당내 역학구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지난 4·9 총선에서 고배를 마신 386세대 인사 등 을 중심으로 한 일부 인사들은 11월 11일 ‘신정치문화원’ 창립기념식을 갖고 본격적인 활동에 돌입했다. 이 모임에는 우상호 이인영 전 의원 등 낙선한 원외 지역위원장을 중심으로 30여 명이 참여하고 있고, 김희철 박선숙 의원 등 현역의원 4명도 포함돼 있다.
이 모임의 이사장을 맡은 신계륜 전 의원은 이날 인사말을 통해 “당의 정체성 확립이 반드시 필요하다. 깃발이 선명해야 다른 곤란한 일이 생겨도 돌파해 나갈 수 있는데 민주당은 그렇지 않다”며 정세균 대표 면전에서 민주당이 처한 상황에 대해 거침없이 쓴소리를 했다. 신 전 의원은 이어 “김대중 노무현 두 대통령 시절의 성과에 대해 자랑스럽게 말하지 못하는 것에서 정체성의 혼란이 오고 있으며 중산층과 서민의 당이라는 것에 대한 지지층의 믿음이 깨져 있다”고 꼬집기도 했다.
신 전 의원은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 비서실장을 지낸 친노(친 노무현 전 대통령) 인사로 분류되고 있어 그가 주도하는 낙선자 모임의 성격 및 정치적 지향점은 향후 본격화될 민주당 내 계파 갈등 국면에서 또 다른 변수로 작용될 것으로 관측된다.
DJ와 노 전 대통령의 행보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당의 사정이 이 정도라면 민주당의 대주주이자 정치 9단인 두 사람이 위기 상황에 대비한 중장기 복안을 이미 가동하고 있을 것이란 관측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정치권 일각에선 DJ와 노 전 대통령이 자신의 고향이자 정치적 텃밭인 호남과 PK(부산 경남)지역을 기반으로 신당 창당을 물밑에서 추진하고 있을 것이란 소문이 나돌고 있을 정도다.
‘호남 신당설’은 DJ의 최대 치적인 ‘햇볕정책’을 지속적으로 승계 발전시키는 동시에 호남 민심을 대변할 수 있는 정치세력을 부활시키고자 하는 DJ의 복심과 맞물려 있다. 얼마 전 기자와 만난 동교동계의 한 관계자는 “DJ는 현 민주당은 다양한 계파가 불안한 동거를 하고 있어 결코 호남을 대변하는 정당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 같다”고 전했다. 호남지역 정가 주변에서는 DJ가 자신의 그림자 역할을 하고 있는 박지원 의원을 정점으로 호남 의원 결집을 은밀히 진행하는 동시에 2010년 지방선거와 신당 창당을 염두에 둔 중장기 프로젝트를 비밀리에 가동하고 있을 것이란 얘기가 설득력 있게 나돌고 있다.
‘PK 신당설’은 노 전 대통령이 사이버 정치활동을 본격화한 데 이어 PK지역 친노그룹도 세력 재결집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부산지역 친노 인사들이 대거 참여한 사단법인 ‘자치21’은 10월 23일 부산 국제신문사에서 임시총회를 갖고 본격적인 활동에 돌입했다. 이사장에는 참여정부 때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과 부산 참여정부평가포럼 대표를 역임한 바 있는 이기숙 신라대 교수가 위촉됐고, 공동대표 겸 운영위원장에는 이정호 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이 선임됐다. 사무처장은 최상영 전 부산참여정부평가포럼 사무처장이 맡는 등 친노 인사 200여 명이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 퇴임 후 뿔뿔이 흩어져 각자 활로를 모색해온 부산지역 친노그룹이 ‘자치21’을 매개로 재결집해 전열을 다시 정비하고 있는 분위기다.
정치권 관계자들은 ‘자치21’이 표면적으로는 ‘부산 발전을 위한 청사진 제시’를 기치로 내걸고 있지만 친노그룹의 정치세력화를 지향하면서 2010년 지방선거와 궁극적으로는 노 전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PK 신당 창당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