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한 혐의를 받고 있는 이정욱 전 원장이 지난 19일 구속되고 있다. 연합뉴스 | ||
그동안 온갖 추측과 소문이 무성했던 ‘박연차 리스트’가 현실화 단계로 접어들면서 여의도 정가에 짙은 사정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는 형국이다. 여야를 망라한 수십 명의 정치인이 리스트에 오르내리고 있고 실명이 공개된 정치인도 10여 명에 달한다. 사정당국 관계자들은 ‘박연차 리스트’가 완전히 공개될 경우 ‘참여정부 게이트’를 넘어 전·현 정권을 망라한 거대한 정경유착 커넥션 사건으로 확전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지난해 연말 박 회장이 구속된 이후 여의도 정치권과 사정당국 주변에서는 ‘박연차 리스트’가 끊임없이 거론돼 왔다. 하지만 검찰은 ‘리스트’ 존재를 완강히 부인해 왔고, 정·관계 인사들에 대한 수사에도 별다른 진전이 없자 이번에도 ‘용두사미’ 수사로 마무리되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돌기도 했다. 주춤했던 검찰 수사에 탄력이 붙게 된 것은 지난주부터다. 검찰은 3월 19일 박 회장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한 혐의로 이 전 원장을 구속한 데 이어 20일 송 전 시장도 같은 혐의로 구속하는 등 정치인 수사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이 전 원장은 2005년 4월 경남 김해갑 국회의원 재선거 당시 열린우리당 후보로 출마하면서 박 회장에게서 5억 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고, 송 전 시장은 지난해 18대 총선 당시 한나라당 후보로 김해을에 출마했을 때 박 회장으로부터 3억 원가량의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한 혐의를 받고 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모두 김해 지역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고, 다른 점은 소속 정당을 달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박 회장이 두 사람 외에 여야를 망라한 지역 정치인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정치자금을 살포했을 개연성을 높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실제로 검찰은 이 전 원장과 송 전 시장이 박 회장으로부터 거액의 정치자금을 받은 정황이 드러난 만큼 경남 김해나 부산지역 전·현직 정치인 상당수가 박 회장과 검은 거래를 했을 가능성을 열어놓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여의도 정가와 검찰 주변에서는 수십 명의 정치인이 ‘박연차 리스트’에 오르내리고 있고 이미 일부 언론에 실명이 공개된 정치인도 상당수에 달한다. 박 회장에게서 후원금을 받았다고 시인한 박관용 전 국회의장을 비롯해 김원기 전 국회의장, 김혁규 전 경남지사, 이광재·서갑원 민주당 의원, 허태열·권경석 한나라당 의원 등이 대표적이다.
실명이 공개된 정치인들은 보도자료 등을 통해 불법 정치자금 수수 의혹을 전면 부인하고 있지만 검찰은 이들에 대한 보강 수사가 끝나는 대로 소환 조사한다는 내부 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져 파장을 예고하고 있다. 실제로 검찰은 지난 주말 이광재 의원 등에 대한 소환을 시작으로 박 회장과 관련된 여야 정치인들에 대한 수사를 본격화하고 있다. 김해를 비롯해 부산·경남지역을 무대로 활동한 일부 정치인을 사법처리한 검찰의 칼날이 숨가쁘게 중앙 정치무대로 향하고 있는 형국이다.
아직 실명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DJ 정부 실세였던 A 전 의원, 경남지역 중진 B 씨, 친박계 핵심 인사 C 의원, 이명박 대통령의 측근인 D 씨 등도 박 회장에게서 거액의 돈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어 사실 여부에 따라 적잖은 정치적 후폭풍이 예상된다. 특히 ‘박연차 리스트’에 오르내리고 있는 인사들이 신·구 정권과 계파를 망라하고 있다는 점에서 검찰의 칼날 방향에 따라 여야 간 수사 형평성 논란은 물론 여권 내부에서도 친이-친박 간 감정싸움을 야기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실제로 검찰의 한 관계자는 ‘박연차 리스트’와 관련해 “성역 없이 수사한다는 원칙에는 변함이 없지만 C 의원의 비중을 감안해 조사 여부를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다”고 귀띔해 수사 대상 선정에 말 못할 고민이 있음을 암시했다.
야권 일각에서는 여권 핵심부와 검찰이 박연차 사건에 대해 사전 조율을 끝내고 짜맞추기식의 기획수사로 몰아가고 있다는 의혹을 강하게 제기하고 있다. ‘박연차 리스트’에 과거 정권 인사뿐만 아니라 현 여권 핵심 인사와 검찰 고위 간부들도 다수 포함돼 있다는 의혹에 힘이 실리고 있는 만큼 여권과 검찰 수뇌부가 수사 대상 및 시기를 조율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전 원장과 송 전 시장을 사법처리하면서 탄력이 붙기 시작한 검찰의 칼끝이 또다시 노무현 전 대통령과 친형인 건평 씨를 겨누고 있다는 점도 이러한 의혹을 부추기고 있다.
일부 언론은 노 전 대통령이 퇴임 후 박 회장에게서 50억 원을 받은 정황을 검찰이 포착했다고 보도하는 등 연일 ‘노무현 때리기’를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 측과 검찰은 이 같은 보도 내용을 전면 부인하고 있다.
이 전 원장에게 전달된 박 회장의 돈 5억 원이 건평 씨를 통해 전달됐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검찰의 수사 방향도 건평 씨의 여죄 및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 문제로 쏠리고 있는 분위기다.
대검 중수부는 3월 20일 이 전 원장이 2005년 4월 재·보선 당시 건평 씨에게 선거자금 지원을 요청해 노 씨가 박 회장으로부터 현금 5억 원을 받아 이 전 원장에게 정치자금으로 불법 제공했다고 밝혔다. 돈 전달 장소는 건평 씨가 2006년 4월 정화삼 씨의 동생 광용 씨에게서 두 차례에 걸쳐 각각 현금 2억 원과 1억 원을 건네받았던 봉하마을 저수지 옆 창고로 밝혀졌다.
여권 일각에서는 건평 씨의 막강한 영향력 행사 의혹을 넘어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 의혹까지 제기하고 있는 실정이다. 박 회장과 노 씨 등의 석연치 않은 돈 거래에 비춰볼 때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을 박 회장이 관리해 오다 재·보선 자금으로 건넨 것 아니냐는 것이다.
정가에서는 지난 21일 검찰이 박 회장으로부터 청탁과 함께 수억 원을 받은 혐의로 추부길 전 비서관을 체포한 것을 두고 여러 가지 해석을 내놓고 있다. 박연차 리스트 수사가 친박계와 구 정권을 겨냥하고 있다는 이른바 ‘음모론’을 진화하기 위해 ‘형평성’ 차원에서 추 전 비서관을 서둘러 체포했다는 시각이 적지 않다. 특히 현 정권의 ‘대운하 전도사’로 불리던 추 전 비서관을 잡아들일 정도면 친박계나 노무현 정권 인사의 경우 더 큰 거물이 걸려든 게 아니냐는 얘기도 흘러나오고 있다.
서서히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는 ‘박연차 리스트’와 관련한 검찰 수사가 또다시 참여정부 비리로 선회할지 아니면 현 정부 실세까지 날릴 정·관계 사정광풍으로 확대될지 검찰의 수사 추이에 국민적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