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슬픈 비경을 간직한 실미도 해안. 피빛 노을이 가슴 아리도록 붉다. | ||
고된 극비훈련을 거쳐 살인 병기로 양성된 특수부대는 그러나 때마침 조성된 남북대화 분위기 속에서 존재가치를 잃게 된다. 훈련 사실 자체를 지하에 묻어야 하는 당시 정부가 부대를 해체할 수도 존속시킬 수도 없어 방치해둔 상황에서, 참다못한 부대원들은 훈련장인 실미도를 탈출, 탈취한 민간버스를 타고 청와대를 향하게 된다.
냉전시대의 비사를 담은 영화 실미도는 개봉 한 달여 만에 5백만의 관객을 모으면서 세계적인 화제작이 됐다. 실미도. 전설 속에서 툭 튀어나온 이름같지만 실은 서울에서 1시간 남짓 시간에 도달할 수 있는 아주 가까운 섬이다. 새 국제공항이 들어선 영종도 곁에 바로 붙어있는 섬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본 사람들이 실미도의 실체를 보기 위해 몰려들고 있다.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를 선택하라면 지금은 선뜻 영종도를 꼽는 사람이 적지 않다. 물론 인천 연안부두가 가깝긴 하지만, 쭉 뻗은 공항고속도로를 타면 영종도까지 40분 정도면 족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연안부두에서 기다려 배를 타고 영종도에 들어간 후 거기서도 한참 섬마을 좁은 길을 달려서야 을왕도며 용유도 선착장까지 갈 수가 있었다. 그러나 10년 전 공항건설이 시작되면서 영종도 용유도 을왕도가 하나의 땅이 되었고, 2000년 공항 완공과 함께 영종대교가 들어서면서 영종도는 반나절 나들이가 가능한 서울 근교로 편입되었다.
영화속의 섬, 실미도는 바로 그 영종도에서 배로 5분 거리, 바로 눈앞에 잡힐 듯 떠있는 무의도의 부속섬이다.
서울을 떠나 가까운 시간, 발 아래 펼쳐지는 바다와 작은 섬들의 풍경이 겨울바람에도 반갑게 느껴진다. 도심에서 부대끼던 ‘나’가 잊혀질 만큼 차갑고도 시원한 바람이 폐부에 가득 들어차고 어느새 ‘만땅’ 충전된 활력에 돌아가는 길조차 기분 좋은 여행. 부담 없이 떠나는 인천의 섬들이 아름답다.
영종도 신공항을 지나쳐 잠진도 선착장 입구까지 쭉 곧은 바닷가 포장도로가 시원하다. 이 구간이 끝나면서 신호등이 나타나는 곳이 잠진도다.
본래 낚시꾼들만이 즐겨찾던 곳이지만, 영종대교 완공 이후 주말 나들이객들이 몰려들면서 잠진도 가는 길목부터 해물집들이 즐비하게 늘어났다. 조개구이며 생선회 매운탕 등 해산물이 푸짐하다. 바닷가라곤 하지만 기대하는 만큼 값이 싼 것은 아니다. 이미 찾는 사람이 많은 수도권 유원지이기 때문이다.
잠진도 선착장에서 무의도행 배를 탈수 있는데, 평소에도 휴일이면 선착장 입구 횟집촌부터 차량의 행렬이 밀려있어 배에 차를 싣기까지 1~2시간은 족히 기다리곤 한다. 겨울이 되면서 잠시 한가로웠는데, <실미도> 영화가 뜨는 바람에 이제 계절마저 잊어버렸다.
그 기다림의 시간에 비하면 배를 타고 무의도에 닿는 시간은 5분도 안돼 허망할 정도다. 목적지가 섬이니까 하면서 배 타는 재미를 기대했다면 꽤나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 아직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실미도. 이곳에 만들어졌던 <실미도> 세트장이 철거돼 아쉬움을 남긴다. | ||
같이 있는 섬 가운데 큰 것은 대무의도, 작은 것은 소무의도다. 소무의도 반대편인 북쪽 끝으로 또다른 무인도가 있다. 이곳이 실미도다. 무의도와 실미도는 별개의 섬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하루 두 번 물이 빠질 때마다 백사장이 드러나 하나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오르락내리락 구불구불한 섬길은 깨끗하게 포장이 되어 마을버스가 다니는데도 별 불편은 없어 보인다. 여기저기 이어지는 길을 따라 달려도 금세 바다에 이르러 하나개해수욕장과 실미해수욕장, 국사봉 등의 입간판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영종도에서는 을왕해수욕장이 가장 유명했고 지금도 가장 번화한데, 공항이 들어선 이후로는 그 지형이 크게 변화했다. 해변의 길이나 규모로 보아도 을왕리 남쪽에 있는 마시란 해변이 한결 시원한 데다, 무의도로 들어가는 길도 간편해져 이쪽을 찾는 사람들이 보다 많아졌기 때문이다.
용유동의 마시란해변과 무의도의 하나개해수욕장, 실미도해수욕장은 이미 몇 해 전부터 해수욕객이 크게 늘어났다. 아마 을왕리처럼 편의시설 신축을 허용한다면 벌써 북적북적한 유원지가 됐을 것이다.
무의도는 산 하나가 솟은 모양이어서 국사봉과 호룡곡산 정상으로 짧은 등산도 즐길 수 있다. 정상에서는 인천국제공항이며 물 건너 인천 시가지를 한 눈에 볼 수 있으며, 남쪽으로는 영흥도 제부도들이 눈에 들어온다. 날이 좋으면 멀리 비치는 태안반도까지 조망할 수 있다고 한다. 인천 외항에 떠있는 커다란 배들의 모습은 그림같이 낭만적이다.
하나개해수욕장은 본래 섬 사람들이 하나깨라고 부르던 곳이다. ‘큰 개펄’을 뜻하는 이름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나개해수욕장은 선착장에서 내려 차로 10분이 안걸린다.
길이 1km가량의 해변은 썰물 때면 갯벌이 1백여m 넓이로 드러난다. 고운 모래가 깔린 개펄 앞 겨울바다 위로 맑은 날이면 멀리 황해도 장산곶까지 보일 정도라고 한다. 서쪽을 향한 모래밭까지, 지는 해로 붉게 물들어가는 석양 무렵의 모습이 특히 아름답다. 뒤편으로 짧은 산책로가 있어 호젓한 겨울 낭만에 빠져볼 수 있다.
작은 섬이지만 한가운데는 산봉우리가 우뚝 솟아있어 산에 오르는 것도 좋다. 물론 바다여행 치고는 색다른 맛이다. 무의도는 섬 전체가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240여m의 국사봉과 호룡곡산을 오르는 가벼운 차림의 등산객도 많다. 좌우로 펼쳐진 바다를 거느리고 오르는 쾌감이 남다르다.
▲ 울퉁불퉁 바위들. 이곳에도 684대원들의 발자취가 남아있을까. | ||
하나개에서 언덕을 넘어서도 다다르고, 선착장부터 걸어도 금방이다. 영화 실미도 개봉 이후 찾는 이가 부쩍 늘어난 실미도로 가는 길.
실미도까지 바닷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넉넉한 시간을 두고 일찍부터 나와 모래사장을 걷거나 해변 바로 앞까지 댈 수 있는 차 안에 겨울바람을 피해 앉아있기도 한다.
졸졸졸 흐르는 냇물처럼 물이 얕아지면 장화를 신은 섬마을 아주머니들부터 굴바구니를 들고 건너가기 시작한다. 사람들도 하나둘씩 물 빠진 모래 위를 걸어 채 10분도 안돼 실미도에 도착한다.
굴 껍질로 가득 찬 오른쪽 해변을 돌면서 영화 속 그 무언가가 남아있지 않을까 이사람 저사람 붙들고 물어보는 사람이 많지만, 영화세트장이 있던 자리는 깨끗하게 치워져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잠간 방영하고 끝나는 드라마 한편을 찍은 자리도 ‘드라마 세트장’ 간판을 내걸고 관광객을 불러모으는 세상에, 인천시는 수십억 들여 재현한 막사 건물 등 세트를 촬영이 끝나기 무섭게 깨끗이 철거해 버렸단다.
자연보호를 위해서는 마땅한 일이지만 관객 1천만을 바라보는 ‘대한민국 최대의 영화’를 추억하고 싶은 관객들에게는 애석한 결정이다. 실미도의 원혼들을 위한 위령비 얘기도 나오고 있는 모양이다. 후일 이 자리에 그런 기념비 하나쯤 들어설 지도 모를 일이다.
실미도를 건너면 모래사장 대신 거친 갯바위들만 이어져 사람들은 실망스런 얼굴로 하나둘 발길을 돌리고 만다.
실미도에서 왼쪽 해변을 따라 걸으면 작은 오솔길이 나오는데, 그 길이 바로 부대 막사가 있던 곳으로 통한다. 가벼운 오르막길을 걸으면 어느새 길이 끝나고 ‘공포의 외인부대’가 둥지를 틀었던 막사 자리가 텅빈 모습을 드러낸다.
작은 해변을 낀 천혜의 둥지같은 모양인데, 무의도 쪽에서는 전혀 보이질 않고 양 옆에서도 언덕으로 가로막혀 전혀 눈치챌 수 없는 요지다. 그 지형만 보아도 영화속 장면이 눈에 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