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포돛배에 몸을 싣고 임진강 물줄기를 따라가노라면 어느새 북녘에라도 닿을 듯 옛정취가 물씬 풍긴다. | ||
철원, 평강고원으로부터 내려와 한강과 함께 서해로 흘러드는 임진강은 천혜의 자연경관을 지닌 민족의 강. 남북분단의 현장 비무장지대를 중심으로 누워있어 아직도 소박한 옛모습이 그대로다.
그 무심하고도 적막하기만 한 임진강 나루에도 봄은 한창이다. 옛모습을 재현해 띄운 황포돛배 유람선은 시간마다 관광객을 싣고 강위에 뜬 봄을 낚는다.
전쟁이 일어나기 50여 년 전만 해도 임진강은 서해의 해산물이나 철원 평야의 풍요로운 농산물을 가득 실은 상선들이 번갈아 왕래하는 평화로운 강이었다. 이제는 인적도 끊어진 이 강에 관광과 통일염원이라는 두 가지 바람을 싣고 54년 만에 황포돛배가 출현했다.
광목을 황토로 누렇게 물들인 돛을 달아 만든 황포돛배는 조선시대 한강을 왕래하는 서민들의 대표적인 운송수단이었다.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도 황포돛배가 모여 있는 형상을 본떠 지어졌다. 길이 15m, 폭 3m의 몸체에 12m가 넘는 돛을 단 임진강 황포돛배는 조선시대 조운선을 모델로 해서 전통방식 그대로 15단계 공정을 거쳐 재현되었다고 한다. 최대 47명을 태울 수 있는 이 돛배를 제작한 손낙기 할아버지(73)는 “황포돛배는 민초들과 함께 한 우리 역사의 산 증인”이라며 황포돛배의 명맥이 끊어지기 전에 이를 재현한 것이 다행이라고 말한다.
손 할아버지는 팔당댐 근처에서 퍼온 황토로 돛에 물을 들이고 어린 시절부터 배웠던 기술로 배를 만들었다. 한 척을 만들려면 서너 명이 함께 해도 다섯 달은 족히 걸린다고 한다.
배를 지은 목공의 명맥은 이렇듯 이어졌지만, 이 배를 조종할 수 있는 사공의 명맥은 끊어졌다고 한다. 대형 황포돛을 바람으로만 조절해 배를 움직이는 것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임진강 돛배는 외형만 전통방식으로 만들었을 뿐 아직은 동력으로 움직이고 있다. 손할아버지는 향후 배 한 척을 더 발주하게 되면 돛으로만 움직이는 원형 그대로의 황포돛배를 만들겠다고 벼른다.
강한 바람을 거슬러 가는 물길에서는 돛을 내리고 순풍이 밀어줄 때는 돛을 올려 미끄러지듯 강물 위를 떠가는 것이 황포돛배의 멋이다.
배가 나루를 떠나는 시각. 사람들은 배 안으로 들어가 각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준비된 주황색 구명조끼를 입고 앉으면 마주 보이는 사람도 가까운 거리에 있어 작은 선실은 이내 정감있고 아늑한 공간으로 느껴진다.
두지리 나루터를 출발한 황포돛배는 자장리 적벽을 구경하며 3km를 내려가다 수심이 발목 정도로 얕아지는 고랑포 여울목에서 뱃머리를 돌린다.
강변을 따라 검은 수직바위가 병풍처럼 이어지는 적벽은 돛배 유람의 가장 대표적인 볼거리로 임진강 8경의 하나로 꼽히는 곳이다. 적벽의 재질은 제주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무암으로 60만 년 전 철원지역의 화산 폭발로 그 용암이 흘러 생겨났다고 한다.
임진강의 총 11군데 적벽 중 유람선에서 보게 되는 자장리 적벽은 비교적 짧은 구간인데다 가장 높은 곳이 15m 남짓이지만, 절벽의 형상이나 경관은 다른 어느 곳보다 뛰어나다. 겸재 정선의 ‘연강임술첩’ ‘임진적벽도’ 등의 작품에서처럼 적벽 뱃놀이의 흥취를 느끼기에 그만인 곳이다.
배를 돌리는 고랑포 여울목에서는 3km만 더 가면 북녘 땅이다. 냉전시대, 이 강변과 분단선 사이에서 그 유명한 첫 남침 땅굴이 발견됐었다.
▲ 임진강 물길 황포돛배 여행객들. 40여 분의 짧은 시간이지만 추억을 더듬기엔 모자람이 없다. | ||
다시 두지리로 돌아오면 40여 분이 소요되는 비교적 짧은 유람 시간. 한강 유람과는 달리 빌딩이 없고 그저 푸른 빛의 하늘과 물과 바람뿐이라 한적한 꿈길을 돌아온 기분이다.
임진강에 황포돛배를 띄운 DMZ관광의 박제철 대표(56)는 “나이 많은 실향민 중에는 황포돛배에 대한 기억을 가진 분들이 많다”고 밝혔다. 어린 시절 청운의 꿈을 안고 이 황포돛배로 강을 건너왔다가 영영 귀향길을 잃어버린 사람도 있지 않을까.
임진강 나루는 옛날 한양에서 송도를 거쳐 의주로 가는 관문으로, 교통이 빈번한 곳이었다. 이곳 뱃사공들은 여러 사람들을 상대하다 보니 옷차림이나 거동만 보아도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아맞히기로 유명했다.
하루는 다른 곳의 짓궂은 뱃사공이 얼마나 잘 사람을 알아보는지 시험을 하기 위해 양반으로 가장해 임진나루 뱃사공을 찾아 “여보게 나를 좀 배로 건너 주게”하고 반말을 했더란다. 김씨 성을 가진 임진나루 뱃사공은 부지런히 배를 대면서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누구 보고 반말이냐”며 화를 냈다. 변장한 양반이 짐짓 진노한 척 “이놈아! 감히 누구 안전에서 행패냐”고 하자 “너는 아무리 양반인 체 해도 나와 같은 뱃놈에 불과하다”고 했단다.
“네가 어찌 그런 것을 잘 아느냐”고 묻자 뱃사공이 하는 말이 “노를 젓느라 고개가 돌아간 것이며 강바람에 수염이 한쪽으로 돌아간 것을 보아 너는 나와 같은 뱃사공이 아니냐”라고 대답하니 “참으로 귀신같이 맞힌다”며 껄껄대며 서로 웃었다는 전설이다.
두지리 나루터는 한강변 자유로(23번)를 타고 계속 달리다 보면 임진각 바로 전에 문산 방향으로 빠지는 당동IC를 이용해 37번 국도를 타고 문산, 파평을 지나 연천 방향으로 계속 직진하면 된다. 적성면 번화가에 도착하면 면사무소를 지나 바로 좌회전한다. 3km 거리에 굴다리를 지나면 장남교가 나온다. 장남교 건너기 전 굴다리에서 나오자마자 좌회전하면 나루터로 들어서는 비포장도로가 나온다.
파주시 적성면은 참게, 황복과 함께 매운탕이 유명한 곳. 오염되지 않은 임진강에서 잡은 깨끗한 민물고기로 매운탕을 끓여내면 그 맛이 담백하고 시원하다. 황포돛배가 등장하면서 관광객들의 차량도 함께 몰리고 있지만 그래도 다른 관광지에 비해 조용하고 한적해 나들이 코스로 부담없다.
적성면 중심지를 벗어나 나루터까지 가는 길은 차선조차 없는 시골길에다 아직 포장도 되지 않아 먼지도 폴폴 날리지만, 길가에는 유명한 매운탕집들이 간간이 보인다. 황포돛배를 타고 난 후 얼큰한 매운탕을 맛 보는 것도 좋다.
유람선 이용
두지리 나루에서 승선 요금은 성인 8천원, 소인 4천원이다. 임진각에도 매표소가 있는데 이 경우 셔틀버스 이용까지 합쳐 성인 1만원, 소인 4천원이다. 운항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두지나루 031-958-2557, 임진각 954-2066.
근처 들를만한 곳
임진각에서 매표를 한다면 황포돛배 유람이 포함된 육로 안보 코스(1만7천원)를 선택할 수 있다. 특히 일본인이나 단체 여행객들에게 인기가 많다고 한다.
임진각에서 출발한 버스는 임진강 장파리에 있는 민통선 리비교를 건너 비룡부대 작전지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곳부터 비포장인데 최대 1평당 서너개의 지뢰가 발견되는 지역이라 정해진 길을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안되는 곳이다.
‘실미도’ 영화로 기억이 새로워진 북한 124군부대 간첩단이 철책을 뚫고 잠입한 현장이 보전돼 있는 곳으로 이동하는 비포장도로는 신의주시에서 목포까지 이어지는 1번 국도의 중단점이기도 하다. 남방 한계선 철조망을 따라 걸어서 승전 전망대에 오르면 북녘땅이 손에 잡힐 듯 내려다 보인다.
한편 지뢰를 시청각 교재를 통해 교육한 후 지뢰지대 체험장과 지뢰탐지, 제거 시범교육, 모의 지뢰 찾기 등 ‘평화의 지뢰체험 캠프’도 4월부터 본격적으로 실시될 계획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