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10월13일 노무현 당시 대통령후보가 광 주에서 열린 국민참여운동본부 광주·전남지역 본부 출범식에 참석한 뒤 돌아가고 있다. | ||
민주당 경선과 대선에서 압도적 지지를 보내 ‘노무현 대통령’을 만들었다고 자부하는 호남인들 중 상당수가 최근 새 정부의 국정이 그들의 ‘기대’와 어긋나게 진행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는 것.
특히 각료 인사와 특검법 공포가 있은 뒤에는 지역에서 ‘신(新) 호남 소외’ ‘역(逆) 지역차별’이라는 정서도 들먹이고 있다는 후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개혁노선을 견지, 내년 총선 승리를 통해 ‘반대통령’이 아닌 명실상부한 대통령이 되겠다고 표방한 바 있다. 그러나 요동치는 호남 민심을 붙잡지 못한다면 ‘온전한 대통령’은 희망사항에 머무를 수도 있는 게 요즘의 상황이다.
지난 3월14일 민주당 설훈 의원 후원 행사에 모인 동교동계 의원들의 표정은 내내 굳어 있었다. 같은 날 전격 공포된 노무현 대통령의 특검법 수용 결정 때문이었다.
노무현 정권에서 비주류로 전락한 동교동계 의원들은 이날 ‘3·14조치’가 동교동계와 확실한 선을 긋고 김대중 전 대통령까지 겨냥할 수 있다는 데 큰 우려를 나타냈다.
후원회가 끝난 뒤 일부 의원들은 따로 모여 탈당까지 운운하며 분통을 터트렸지만 일단 당에 남아 사태 추이를 지켜보다 행동을 같이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노 대통령의 ‘특검법 수용’은 당내 의원들뿐만 아니라 전통적 민주당 지지파, 특히 호남지역 당원들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준 것으로 여겨진다.
지난 2월 말 한화갑 대표의 사퇴를 만류하며 집단행동을 했던 ‘한사랑’(한화갑을 사랑하는 모임) 회원들은 특검법 수용이 공포된 뒤 연일 한 의원 사무실을 오가며 노 대통령과 신주류측을 향해 무언의 시위를 하기도 했다.
서울 동대문에 산다는 박아무개씨(43)는 “민주당 없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나. 그 사람(노 대통령)을 후보로 만들고 대통령이 되게 하는 데 민주당 사람들만큼 헌신한 사람들이 있나. 대통령이 됐다고 우리들을 반개혁세력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파렴치한 짓”이라고 비난했다.
한 전 대표의 지역구(전남 무안·신안)에서 올라왔다는 이아무개씨(46)는 “죽 쒀서 남 좋은 일 했다”며 호남 민심이 크게 격앙돼 있다고 털어놨다.
▲ 노풍’의 진원지 호남 민심이 악화되고 있다. 지난해 3월 16일 광주 대선후보 경선에서 1위를 차지한 뒤 기뻐하는 노무현 당시 후보. | ||
김 의원은 3월9일 청와대 오찬에서 노 대통령에게 특검법에 대해 ‘완전한 거부권’을 행사해줄 것을 요청한 바 있다. 김 의원이 그처럼 강도 높은 주장을 한 데는 지역 여론을 의식한 측면이 없지 않다.
특검법에 대해 당시 호남 민심은 ‘수용 불가’쪽에 기울어 있었다. 이는 민주당의 자체 여론조사에서도 같은 결과로 나타났다. 정세분석국이 20세 이상 전국의 성인남녀 1천6백69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한 결과(신뢰도 95%, 표본오차 ±2.3%) 호남지역은 타 지역에 비해 특검법 반대가 압도적으로 높았다.
특검법에 대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여부’에 전국적으로 찬성 36.2%, 반대 40.1%, 유보 23.7%로 나타난 데 반해 호남에서는 ‘거부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입장이 59.3%로 전국에서 가장 높게 나타났다.
그런 까닭에 노 대통령의 특검법 수용은 호남 지역 의원들에게 커다란 충격이었고, 호남 민심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광주에 사는 정수영씨(38)는 “노 대통령의 결정은 영남표를 의식한 것으로 호남의 여론과 이 지역 의원들의 요청이 철저하게 배제됐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노 대통령의 특검법 수용은 호남의 상당수 젊은 층에서도 반발을 불렀다. 광주의 노사모 회원인 최아무개씨는 “노무현을 지지한 것은 좌고우면하지 않는 개혁노선 때문이었다”며 “집권 후 보수층을 의식한 행보에 실망했다. 특검법도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각료 인사에서 호남 출신들이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당했다는 피해의식에다 특검법 수용으로 인한 ‘호남 푸대접론’이 확산되면서 호남 민심은 급격히 요동을 치고 있는 상태. ‘신호남소외’ ‘역지역차별’ 등의 화두가 지역 정서를 자극, 민심이 등을 돌리는 양상으로까지 나타나고 있다.
민주당 홈페이지에 호남 출신이라고 밝힌 한 네티즌은 “호남에서 95%의 지지를 보내줬는데 돌아온 것은 배신”이라며 “영남 민심만 민심이고 호남 민심은 무시해도 되느냐”며 불만을 나타내기도 했다.
노 대통령 진영은 내년 총선에서 승리, 명실상부한 ‘노무현 정권’을 수립하겠다는 복안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 방안 중 하나로 호남을 텃밭으로 하고 PK(부산·경남)에서 약진, 다수당이 되는 이른바 ‘윈-윈(Win-Win)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이대로 간다면 노 정권의 ‘윈-윈 전략’이 자칫 ‘위험한 줄타기’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영남표를 잡으려다 텃밭 민심마저 돌아설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노 대통령은 더 이상 지역 정서에 얽매이지 않는 정치를 펴겠다고 표방한 바 있다. 또한 지역 정당의 한계를 딛고 전국당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어차피 한 번의 ‘통과의례’가 필요하다고 보는 측근들도 있다. 이번 특검법 수용이 그 분수령이 될 것이라는 시각이다.
그러나 민주당의 ‘당심’은 상당히 흔들리는 모습이다. 가장 유력한 텃밭인 호남 민심이 자꾸 눈에 밟히는 까닭이다. 노 대통령으로서도 바로 이 부분이 고심할 수밖에 없는 대목. 현실적으로는 호남의 지지가 없이는 총선 승리도, 총선 승리가 없으면 개혁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은 지난 1월23일 민주당 연찬회에서 “내년 총선에서 이기지 못하면 ‘반(半)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총선 승리의 초석이 될 호남 민심이 균열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공교롭게도 지역 민심이 요동칠수록 민주당 신주류측의 ‘청산 대상’인 구주류의 입지가 더욱 넓어지는 역효과도 생기고 있다.
특검제 수용 등으로 인해 노 정권에 거리를 두고 있는 호남 민심이 계속 확산될 경우 ‘반대통령’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럼에도 민심을 어루만질 만한 ‘묘약’이 좀처럼 나오지 못하는 상황이다. 바로 여기에 노 대통령의 딜레마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