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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종시 총리’ 정운찬 국무총리가 지난 11일 서울 세종로 정부종합청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세종시 수정안을 발표하고 있다. 임영무 기자 namoo@ilyo.co.kr | ||
지난해 11월 중순 한나라당 주류 일부 의원들은 이명박 대통령이 추진하고 있는 세종시 원안 수정의 ‘출구전략’을 논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공성진 최고위원과 장광근 사무총장 등이 공개석상에서 잇달아 출구전략을 염두에 둔 듯한 발언을 했다. 이 대통령 역시 당 지도부와의 회동에서 “국민의 이해를 구하고 설득해야 한다. 그래도 안 되면 도리가 없는 것 아니냐”며 한 발 빼는 듯한 스탠스를 취했다. 청와대의 적극 부인으로 출구전략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지만 여권 일각에서는 퇴로를 열어둬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청와대는 수정안 기획자로 알려진 박재완 국정기획수석 주도 아래 끝까지 밀어붙였고 그 결과물을 지난 1월 11일 발표했다.
세종시 논란에 처음 불을 지폈던 정 총리 역시 여권 내에서 세종시 강경론자로 꼽힌다. 이는 사활을 걸었던 수정안 추진 철회는 곧 급격한 위상 약화와 함께 차기 대권 주자군에서의 ‘탈락’을 의미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실세 총리와는 거리가 멀었던 정 총리의 유일한 ‘승부수’였던 것이다. 이 때문인지 출구전략이 제기되자 정 총리는 수정안 작업에 더욱 애를 썼던 것으로 알려졌다. 세종시 관련 업무를 맡았던 총리실의 한 인사는 “정 총리가 취임하자마자 제일 먼저 한 것이 세종시 전담팀을 만든 것이었다. 정책으로 승부하면 여론을 뒤집을 수 있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는데 이를 이 대통령에게도 전달한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
이 대통령도 강공 드라이브를 걸며 정 총리 등에게 힘을 실어줬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설령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할 만큼 했다’라는 인식을 심어줄 수만 있다면 밑지는 장사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솔직히 정부에서 정책을 내놓는 동안 박근혜 전 대표를 비롯한 반대 세력들은 ‘약속을 지켜라’고 주장한 것 외엔 별다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지 않느냐”면서 “국회의 통과 여부를 떠나 여론은 결국 우리 손을 들어줄 것”이라고 자신했다.
세종시 수정을 놓고 잠시 주춤하던 청와대가 이처럼 ‘적극 모드’로 나서자 이제 기업들이 다급해졌다. 세종시 입주에 따른 이해득실을 따지기 위해 고위 임원들이 정부 당국자들과 잇달아 회동을 가졌고 자체적으로 TF팀을 급히 꾸려 대책 마련에 나섰다. 당초 재계에서는 세종시 수정안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가 우세했다. 경제적인 이득이 확실히 보장되지도 않을뿐더러 굳이 여론과 등을 지면서까지 입주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 재계 일각에서는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인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세종시 원안을 고수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망설이고 있을 것이란 관측도 나왔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졌다. 대통령이 직접 사안을 챙기고 있고 최측근들이 기업 유치에 뛰어들자 기업들도 부담을 느끼게 된 것이다. 물론 여기엔 정부가 제시한 파격에 가까운 입주 조건도 한 몫 했다는 평이다. 결국 재계 1위 삼성(2조 500억)을 필두로 롯데(1000억) 한화(1조 3270억) 웅진(9000억) 등이 세종시에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외국기업 중에선 오스트리아 국적의 SSF가 1380억 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총 3조 5150억 원으로 예상보다 큰 규모의 금액인데, 정부와의 막판 협상에서 증가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와 기업들은 수정안 발표 3일 후인 지난 14일 투자를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30대 그룹 중 절반 이상이 세종시 입주를 타진했던 것으로 알려진 만큼 그 눈치 싸움도 치열했다. 입주기업 중 한 곳은 수정안 발표가 임박해서야 정해졌을 정도다. 그렇다고 입주 기업들이 승리의 샴페인을 터트리고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 <일요신문>이 세종시에 입주하기로 결정된 4개 기업 관계자들과 접촉해 본 결과 수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기를 바라는 이는 드물었다. 오히려 박 전 대표가 더욱 강하게 원안을 고수해줬으면 하는 바람도 들을 수 있었다. 입주 경쟁에 뛰어들긴 했지만 그것이 ‘자의’는 아니었을 것이라고도 추측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뒤늦게 입주 의사를 내비친 현대·기아차 LG CJ 효성 등의 대기업 역시 ‘액션’만 취하고 있을 뿐 구체적인 방안 마련은 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에 ‘왕따설’이 나돌았을 만큼 세종시 논의에서 배제된 것으로 알려진 SK그룹의 한 관계자는 “지금 기업들에게 할당된 부지(347만㎡·105만 평) 중 50만㎡(15만 평)이 남아 있어 대기업들이 들어갈 공간은 별로 없다. 그것을 잘 알면서도 왜 서로 들어가겠다고 하겠느냐.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정책에서 빠져 나중에 후환을 입을 것을 걱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입주하면 좋고 입주하지 못하더라도 어필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고 털어놨다.
정부에서 섭외 ‘영순위’로 꼽았던 삼성그룹은 지난해 말 이건희 전 회장이 사면되면서 세종시 입주가 유력하게 점쳐졌었다. 정치권 일각에선 사면과 세종시 입주를 맞바꾼다는, 이른바 ‘빅딜설’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정부와 삼성 측은 “전혀 근거 없다”며 일축하고 있다.
그런데 지난 11월 말 이 전 회장의 최측근 A 씨가 정 총리를 직접 찾아가 이 문제를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A 씨는 이 대통령 핵심 측근으로 분류되는 청와대 인사와도 만남을 가졌다고 한다. 삼성의 한 관계자는 “우리는 경제적인 이득이 없으면 아무리 정권에서 강요한다 하더라도 투자하지 않는다. 그런데 회장님과 관련된 사안은 다르지 않느냐. A 씨가 정 총리를 두 차례, 또 청와대 인사와 만나 사면과 세종시에 관한 것을 협의했던 것으로 안다”고 털어놨다.
총리실 인사 역시 “정 총리가 A 씨를 만난 것으로 안다. 서로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것 아니겠느냐. 재계 1위인 삼성 유치에 성공하지 않고서는 수정안이 힘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박연차 게이트’에 연루돼 현재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통령 대학동기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이 다리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소문도 들린다. 천 회장은 이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로 알려져 있지만 이건희 전 회장과도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그런 말이 나오는 것으로 보인다.
정보 수집 능력이 뛰어난 것으로 유명한 삼성은 정부 제안을 받은 이후 전방위적인 검토 작업에 나섰다. 삼성의 또 다른 관계자는 “수정안이 국회에서 처리되기 힘들 것이란 보고서가 올라갔다”면서 “(국회 통과는) 우리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 기업들 중 최대인 2조 원대의 투자 계획을 밝혔고 MOU도 체결했다. 만약 통과되면 하겠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우리 책임은 아니지 않느냐”고 말했다. 김순택 신사업추진단장 역시 “국제과학 비즈니스벨트 조성이 안 된다면 굳이 세종시에 들어갈 필요는 없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대해 정치권과 재계에선 철저한 계획과 시스템대로 움직이는 ‘관리의 삼성’이 애초부터 수정안 통과가 힘들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정부와 협상에 나선 게 아니냐는 얘기마저 흘러나오고 있다. 아무리 이 전 회장 사면을 보장받았다고는 하지만 2조 원이 넘는 막대한 투자를 선뜻 결정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배경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삼성으로선 수정안이 통과되지 않더라도 최우선 과제였던 이 전 회장 사면을 해결했고 정부에 대해 생색도 낼 수 있으니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셈이다.
삼성을 제외한 나머지 기업들 중 한화와 웅진의 세종시 입주는 다소 의외라는 것이 재계의 반응이다. 제2롯데월드 건설 허가로 이 대통령이 내세운 ‘비즈니스 프렌들리’의 대표적인 수혜 기업으로 평가받는 롯데는 일찌감치 세종시 입주가 예상됐지만 한화와 웅진 두 기업은 지난해 말 갑작스럽게 후보로 떠올랐다. 4대 그룹 중 한 곳을 포함해 쟁쟁한 대기업들을 모두 물리치고서 말이다. 특히 한화는 1조 3270억 원이라는 투자금액으로 재계를 더욱 놀라게 했다. 여기엔 김승연 회장의 의지가 강하게 작용했다고 한다. 김 회장은 투자, 인수·합병(M&A) 등 그룹 내 중요사안에 대해서 직접 결정하고 진두지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종시 입주 역시 김 회장이 성사시켰다는 것이 그룹 내부 분위기. 한화의 한 관계자는 “김 회장이 지난해 12월 현 정권 막후 실세로 불리는 B 씨를 만나 입주를 부탁했고 이것이 결정적인 작용을 했던 것 같다. 물론 청와대와 총리실에서 투자를 해달라는 전화도 여러 차례 받았다”고 말했다. 정치권에선 B 씨가 한화뿐 아니라 외국계 기업인 SSF의 투자 유치를 이끌어낸 ‘주역’으로도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한화는 아직 구체적인 투자 계획은 수립하지 않은 상태다. 2020년까지 순차적으로 투자하겠다는 대원칙만 밝혔다. 9000억 원을 투자하기로 한 재계서열 32위(공기업 및 민영화된 공기업 제외) 웅진 역시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재계에서는 과연 이들 기업들이 약속한 투자를 제대로 지킬지 의구심을 나타내는 이들이 많다. 수정안이 통과도 되기 전에 MOU를 체결한 것을 두고 정부가 기업들에게 ‘퇴로’를 확보해줬다는 비난도 나오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회장 조석래)의 한 관계자는 “기업들이 (이 대통령 임기가 끝나는) 3년 후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박근혜 전 대표를 비롯한 수정 반대론자가 대통령이 될 경우 기업들만 골탕 먹을 가능성이 큰 것 아니냐. 다른 혁신도시들을 보더라도 MOU까지 체결했더라도 실제론 기업들이 입주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장기 프로젝트인 만큼 기업들이 섣불리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재계 일각에서는 대기업들이 이처럼 입주경쟁을 펼친 것을 두고 정부가 지난해 하반기부터 기업들에 대해 강도 높은 사정을 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것과 연관 지어 바라보기도 한다. 검찰은 지난해 하반기 대한통운 SK건설 두산인프라코어 등 10여 개 기업에 대해 동시다발적으로 수사에 나서며 기업들을 압박했다.
당시 재계에서는 “검찰이 향후 정부가 추진하는 경기부양 정책 등에서 재벌들 협조를 이끌어내기 위해 초강수를 두고 있다”는 관측이 제기됐었다. ‘기업 저승사자’로 불리는 공정거래위원회 역시 9월 취임한 정호열 위원장의 지시로 기업의 담합을 집중 조사했고, 그 결과 지난해 12월 LPG업체들에게 6689억 원이라는 거액의 과징금을 부과해 재계를 불안에 떨게 했다.
앞서 언급한 전경련 관계자는 “기업들이 ‘당근’만 보고 세종시에 들어갔겠느냐. 그 뒤에 따라올 ‘채찍’을 무서워하고 있는 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에 세종시에 입주한 기업 중 한 곳의 임원 역시 “알아서 기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지난해부터 우리 회장님이 비리 혐의로 내사 대상에 올랐다는 소문들이 들렸는데 괜히 밉보일 필요는 없는 것 아니냐. 아무리 특혜를 준다해도 수천억 원대에 이르는 투자를 단시간 내에 하기로 결정한 데에는 단순히 경제적 사정만 고려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