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5월 경영혁신 공유행사인 스킬올림픽에 참석한 구 회장이 격의없이 사원들과 어울리 고 있다(위). 부친 구자경 명예회장의 고희 연에 모친 하정임 여사와 자리를 함께한 네 아들(뒷줄 왼쪽부터 구본준, 구본무 회장 , 구본능, 구본식). | ||
▲생년월일:1945년 2월10일(57세)
▲1964년 3월 연세대 상대 입학
▲1968년 미국 애쉬랜드대 입학
▲1972년 미국 애쉬랜드대 졸업
▲1975년 LG화학 심사과장 입사
▲1977년 LG화학 수출관리 부장
▲1980년 LG전자 기획심사 본부장
▲1981년 LG전자 이사
▲1984년 LG전자 일본 동경주재 상무
▲1985년 LG회장실 전무
▲1986년 LG회장실 부사장
▲1989년 LG그룹 부회장
▲1995년 LG그룹 회장
▲병역:육군병장 만기제대
▲취미:골프
▲하루일과:오전6시 기상, 자정 취침
▲담배 및 주량:담배는 피우지 않고, 주량은 소주 반병 정도
▲좌우명:약속은 꼭 지킨다, 근검절약하는 생활자세를 갖는다
▲가족관계:부인 김영식(50) 사이에 2녀
▲건강관리:규칙적인 생활, 골프 등 야외운동
▲구본무 회장 가계
조부: 구인회(LG그룹 창업주• 별세) 조모: 허을수(별세)
부친: 구자경(LG그룹 명예회장•77세) 모친: 하정임(78세)
딸: 구연경(24세) 연수(6세)
여동생: 훤미(55세) 미정(47세)
남동생: 본능(희성그룹 회장•53세) 본준(LG필립스LCD 사장•51세) 본식(희성정밀 부사장•44세)
‘울고넘는 박달재’‘번지없는 주막’을 구성지게 부르는 재벌총수, 누구보다 ‘새’를 무척이나 사랑하는 이웃집 ‘아저씨’ 같은 털털한 인상의 회장님. 한국 재계의 거함 LG그룹 구본무 회장이다.
올해 57세(1945년 2월10일생)의 나이로 해방둥이인 구 회장은, 7년 전인 1995년 2월 만50세의 나이에 LG그룹의 총수에 올랐다. 나이로 보면 그는 재계 총수들 가운데 장년 축에 속한다. 그러나 그를 그렇게 여기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재계 관계자들은 구 회장을 아직도 ‘재벌 3세 경영인’이라며 젊은 재벌총수로 여기고 있다. 부친 구자경 명예회장이 아직 건강하게 생존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6년 전인 1996년 쉰이 넘은 나이에 막내딸을 얻었을 정도로 부부금실이 좋다.
구 회장은 가끔 부인과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를 찾아 음악 공연이나 오페라를 감상하곤 한다. 임원들이 전하는 얘기에 의하면 구 회장은 공연장 등을 찾을 때면 동부인하여 자상하게 대해주는 모습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부인사랑이 끔찍하다고 한다.
부인 김영식씨는 김태동 전 보사부 장관(나중에 내외경제신문 사장도 역임했다)의 딸이다. 김태동 전 장관의 집안은 충북 괴산의 수재집안으로 유명한 가문이다. 김씨는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한 뒤, 구 회장이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던 1972년 무렵 중매로 만나 결혼에 골인했다.
구 회장은 외모에서 풍기는 소탈한 인상처럼 형식주의와 격식주의를 철저히 배격한다. 그는 1995년 그룹회장에 취임하자마자 기존의 딱딱한 느낌을 주던 합동이사회의 명칭을 ‘임원세미나’로 바꿨다.
그는 그룹의 모든 임원회의에 회의 시작 10분전 반드시 도착해 임원들을 당황하게 만들 정도이다. 회의에서도 자신의 생각은 길어도 3분을 넘기지 않을 정도로 간결하게 정리해 말한다. 다른 사람에게 말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이다.
그는 해외출장 때도 수행비서와 출장목적과 관련된 담당임원 한사람만 동행하고, 출장지에 도착했을 때도 공항에 주재원이 마중나오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지금은 회장이 되어 행동이나 활동에 제약을 받지만, 구 회장은 동료나 부하 직원들과 격의없이 술자리를 갖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직원들과 술자리를 하면 농도짙은 유머로 딱딱한 분위기를 일순간에 바꾸어 놓기도 한다. 구 회장은 유머의 소재도 매우 풍부해 다른 사람에게 한번 들려준 내용은 상당기간 동안 다시 반복하지 않을 정도라는 것이다.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구 회장의 농도짙은 유머는 장인(김태동 전 장관)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평소 구 회장의 장인은 농담을 잘해 곧잘 좌중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곤 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구 회장의 외모에서 풍기는 이미지가 털털한 이웃집 아저씨 같다고 그를 쉽게 생각하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겉인상과 달리 그는 대단한 집념의 소유자이고, 성격이 매우 급할 뿐 아니라 불 같다. 평소 화를 잘 내는 것은 아니지만, 한번 수가 틀어지면 쉽게 풀어지지도 않는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구 회장의 핵심 참모역을 맡았던 이문호 인화원 부회장(그룹 연수원, 전 회장실 사장)도 공개한 적이 있다. “구본무 회장은 정이 많고 자상하지만 성격이 급해 불같이 화를 낼 때가 종종 있다. 한번은 LG건설이 시공한 아파트 벽에 금이 갔다는 보고를 받고 ‘당장 헐고 다시 지으라’고 호통을 쳤다.
구 회장이 화가 났을 때는 일단 그 자리를 피하고 보는 것이 좋다.” 성격이 급한 것은 부친 구자경 명예회장과 매우 비슷하다고 주변 사람들은 전하고 있다. 구자경 회장도 과거 전경련 회장 시절, 술자리에서 정부의 재벌정책을 비난하는 발언을 해 소동이 일기도 했다.
구본무 회장 역시 화가 나면 다소 억양이 높아지면서 직설화법으로 생각을 너무 솔직하게 드러내는 나머지 경우에 따라서는 상대방을 곤혹스럽게 만들곤 한다는 것이다. 구 회장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오래전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그가 금성사(LG전자의 전신) 상무로 재직하던 때의 일이다.
당시 구 회장은 임원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는데, 회의에서 임원들이 신용장 네고업무를 경리부로 이관하는 문제를 두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이를 듣고 있던 구 회장은 슬그머니 회의장을 빠져나와 경리부장을 불러 신용장 네고업무를 어떻게 하는 게 좋으냐고 물었다. 경리부장이 경리부 이관이 필요하다고 말하자, 구 회장은 곧바로 회의실로 돌아와 “그 일은 다 해결됐다”고 말하며 즉결처리했다는 것이다. 그후 신용장 네고업무는 경리부로 모두 이관됐다.
▲ 지난 95년 구자경 명예회장으로부터 총수 자리를 물려받은 구 회장이 회장 이취임식 에서 그룹깃발을들어보이고 있다. | ||
구본무 회장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를 집념이 강한 사나이라고 평한다. 그는 일단 어떤 문제에 흥미를 갖거나 일을 성사시켜야겠다고 마음 먹으면 끝까지 밀어붙이는 강한 집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그의 새에 대한 사랑과 골프에 대한 남다른 집념을 꼽을 수 있다.
구 회장의 집무실은 여의도 LG트윈타워 30층 한강변 쪽에 위치하고 있다. 회장실 구석에는 큼지막한 고성능 망원경 세트가 한강으로 향해 고정돼 있는데, 렌즈의 초점이 맞춰진 곳은 한강 중앙에 위치한 밤섬이다. 그 곳에 날아드는 새를 관찰하기 위한 목적이다.
새에 대한 그의 지식은 전문적으로 연구한 박사급 못지 않다는 게 임직원들의 전언이다. 그는 2000년 12월에는 자신이 이사장으로 있는 LG상록재단을 통해 ‘한국의 새’라는 조류 전문 서적을 발간하고 직접 발간사까지 썼다. 국내 최초의 그림으로 된 조류도감인 이 책을 만들기 위해 구 회장은 서울대 이우신 교수 등 전문가들과 4년 동안 6억원을 들일 정도로 혼신을 다했다.
구 회장은 자신이 새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게 된 이유를 이렇게 고백했다. “새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어려서부터 남달랐다.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 우연히 산에 갔다가 다친 새 한마리를 발견하곤 집에 데려와 정성껏 치료를 한 뒤 돌려보내주었다. 그 뒤로 새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그러다보니 지금은 새의 몸짓이나 날갯짓, 울음소리만 들어도 어떤 새인지 자연스럽게 구분이 될 정도이다.” 그가 집무실에 망원경을 설치해둔 또다른 이유는 자유롭게 창공을 날아다니는 새를 보면 복잡한 머리가 시원해지기 때문이다.
그는 경영과 관련해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면 휴식을 취할 겸 장시간 망원경을 통해 한강을 관찰하곤 한다. 이럴 때면 급하지 않은 결재사항은 잠시 미뤄진다. 그는 집무실에서 망원경으로 밤섬을 관찰하다가 새알을 훔치는 사람을 관계당국에 고발한 적도 있다. 천연기념물 황조롱이가 여의도 트윈타워에 둥지를 튼 사실을 알고는 빌딩관리인에게 특별보호조치를 취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그는 지금도 해외출장에 나서면 새와 관련된 외국 전문서적을 구입해 올 정도다.
지금은 싱글 핸디캐퍼인 구 회장의 골프에 얽힌 얘기는 그의 강한 집념을 엿보게 하는 또다른 에피소드 중 하나이다. 그가 골프를 시작한 것은 1970년대 후반 금성사 기획심사 본부장으로 재직하던 무렵이었다. 당시 그는 동료 임원들에게 “우리 집안에는 골프를 잘 치는 사람이 별로 없다. 내가 우리 집안에서 골프를 제일 잘 치는 사람이 되겠다”고 공언을 했다는 것.
그러나 이 말에 대해 동료 임원들은 반신반의했다. 그 이유는 당시 젊은 구 회장이 다이내믹한 운동을 즐기는 데다 낚시와 사냥을 좋아해 정적인 성향의 운동인 골프에 대해서는 별로 흥미를 갖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그런데 동료들의 예상은 빗나갔다.
구 회장은 자신이 살던 성북동 인근 인도어 골프연습장에 등록을 한 뒤 무려 8개월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개근할 정도로 골프연습에 열중했다는 것이다. 물론 인도어에 나갈 동안에는 단 한차례도 필드에 나가지 않았다. 그는 연습장에서 완벽하게 자세를 배웠다고 결론을 내린 뒤, 필드에 나가기로 결심하고 동료들과 한양골프장에서 머리를 얹었다(필드에 처음나가는 것을 말한다).
첫 라운딩에서 그는 보기플레이(기준 타수보다 1타가 많은 것으로 90타)를 기록해 동반자를 놀라게 했다. 그후 그는 골프를 시작한 지 2년반 만에 싱글 수준이 됐다. 그의 호언대로 지금은 LG가에서 골프를 가장 잘 치는 사람이 됐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