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3월 과천 본사에서 열린 신입사원들의 ‘코오롱인 입문식’에서 환영사를 밝히고 있는 이웅열 회장. | ||
이 말은 그가 특별한 내부 다툼없이 재벌의 최고 경영자 자리에 올랐다는 얘기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재벌 2, 3세 경영인과는 달리 그는 비교적 오랫동안 경영수업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전문경영인처럼 현장에서 산전수전을 겪은 것은 아니지만, 이 회장은 그룹 회장에 오르기 전까지 20년 가까이 경영수업을 받았다.
이 회장이 (주)코오롱 사원으로 입사한 것은, 그가 만 21세가 되던 1977년 11월이었다. 당시 그는 고려대 경영학과 2학년을 수료한 뒤, 군대에 입대하던 시기였다. 그는 최전방에서 3년 동안 현역으로 근무를 했다. 이 회장의 입사 시기와 관련해 일각에서는 당시 이원만 회장이 정계에 진출하면서 한국폴리에스텔 사장을 맡고 있던 이동찬 회장과 창업 동지이자 이 회장의 삼촌인 이원천씨간에 경영권을 둔 신경전이 크게 작용했다고 보고 있다.
재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이동찬-이원천 숙질간의 경영권 다툼은 1972년에 시작됐다. 이동찬 회장이 그룹의 주력이던 한국나일롱과 한국폴리에스텔의 업무통합을 추진한 것이 발단이 된 것이었다. 이원천씨가 두 회사의 업무통합을 반대한 것은 이원만 회장이 정계에 진출한 뒤 내심 코오롱의 경영권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두 회사가 통합될 경우 이원천씨의 기대는 무산될 수밖에 없었다. 이 분쟁에는 한국나일롱의 일본 합작선이던 도레이까지 가세한 데다, 임직원들도 편이 갈려 다투는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됐다. 4년 동안 계속된 이 분쟁은 1976년 이원천씨가 한국나일롱과 한국폴리에스텔의 지분을 돌려받고 그룹을 떠나는 것으로 매듭지어졌다.
이 사건의 후유증으로 창업주인 이원만 회장은 경영에서 완전히 퇴진하고, 대신 장남인 이동찬 회장이 그룹의 경영권을 넘겨 받았다. 1977년 1월의 일이었다. 코오롱그룹에서 독립한 이원천씨는 그후 세진레이온(나중에 원진레이온)이라는 회사를 인수해 원진레이온그룹을 세웠다. 그러나 이원천씨는 원진레이온이 망하면서 사업에는 실패했다.
다른 얘기지만, 가족분쟁의 후유증 탓인지 이동찬 회장의 이복동생인 이동보씨도 1988년 계열사인 코오롱고속관광을 갖고 독립했다. 그러나 동보씨 역시 2002년 월드컵 휘장사업 실패로 회사가 부도나 사업에 실패했다. 어쨌든 이웅열 회장이 회사에 입사했던 1977년은 코오롱 기업사에서 보면 그룹의 정통성이 재정립된 시기였다.
창업 3총사인 이원만-이동찬-이원천씨간에 얽혔던 경영권 계승작업이 이동찬 회장 가계로 완전히 정리된 때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이웅열 회장이 21세의 어린 나이임에도 회사에 입사한 것은 향후 그룹의 경영권과 관련해 발생할 수 있는 불안요소를 방지하겠다는 이동찬 회장의 뜻이 담긴 것이었다. 이는 가족간 경영권 다툼이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남겼는지를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이웅열 회장은 입사 초기부터 경영수업을 받진 않았다. 그는 회사에 이름만 걸쳤을 뿐이었다. 그가 본격적인 경영수업에 들어간 것은 (주)코오롱 이사(뉴욕지사 근무)로 승진한 1985년부터였다. 그 이전에는 아메리카대, 조지워싱턴대 등 미국에서 공부를 했다. 그러다가 이 회장은 1989년 7월 그룹기획조정실 실장(전무급)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그룹경영권을 이양받기 위한 수순을 밟았다.
이후 7년 뒤인 1996년 코오롱그룹의 3대 회장으로 취임할 때까지 그는 착실히 경영수업을 받았다. 이런 수업과정을 감안하면 이웅열 회장의 경영수업은 다른 재벌2세 경영인들보다 매우 탄탄한 길을 걸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경영인 이웅열’에 대한 재계의 평가는 비교적 긍정적인 게 사실이다. 그에 대한 재계 인사들의 평가를 들어보자. 손병두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의 얘기. “이 회장은 전문성과 결단력, 그리고 소탈함을 겸비한 CEO이다. 디지털시대인 IT분야를 선도할 경영자임에 틀림없다.”
▲ 이 회장은 지난해 10월 방한한 미 HP사 피오리나 회장과 만나 IT사업 등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 ||
물론 그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젊은 경영인들이 범하기 쉬운 ‘리스키(risky)’함도 배제할 수 없다. 또 전문 경영인들의 뜻에 반해 지나치게 자신의 경영방식을 고집하는 ‘독선적인 면’도 없지 않다는 지적이 있다. “코오롱그룹에는 총수는 있어도, 전문 경영인은 보이지 않는다’는 일부의 시니컬한 평가도 그런 점에서 연유되는 듯하다.
이 회장의 강한 개성이 전문경영인들에게 압박감을 준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는 이 회장이 ‘끼’를 강조하는 등 신세대적인 경영감각을 중요시하는 반면, 섬유위주로 성장해온 그룹임원들은 여전히 보수적이고 관료적인 문화가 남아 있어 신구의 조화가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 회장 스스로 ‘관료주의 타파’를 선언한 데서도 코오롱 내부의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다.
코오롱은 40대 총수에 의해 경영이 주도되고 있음에도 젊고 참신함보다는 보수적이라는 이미지를 지울 수 없다. 이는 코오롱의 태생적인 역사성에 기인하는 측면이 강하다. 코오롱은 지난 1954년 고 이원만 창업주가 개명상사(코오롱상사 전신)라는 회사를 설립하면서 출범, 올해로 창립 49주년이 된다.
창업주인 고 이원만 회장은 경북 영천의 만석꾼 집 아들이었다. 당시 세간에는 ‘영남 갑부는 이원만, 호남 갑부는 김성수’라는 말이 유행했다. 이원만 회장은 6•25전쟁이 끝난 직후 한국나일롱이라는 회사를 세웠고, 이 회사는 전쟁특수를 타고 그를 돈방석 에 앉혔다. 코오롱이라는 이름은 한국(Korea)과 나일론(Nylon)의 영문을 합친 것이다.
코오롱은 4•19혁명이 일어난 직후 3백20만달러라는 거액의 차관을 받으면서 한단계 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당시 코오롱의 신청금보다 40만달러나 많은 DLF차관을 승인해준 사람은 자유당 정권의 마지막 부흥장관이던 신현확씨였다.
이 돈을 발판으로 코오롱은 당시 5•16쿠데타와 함께 대부분의 재벌들이 부정축재자로 몰려 위기를 맞았던 것과는 달리 나일론 원사생산 공장 설립에 투입, 기업이 한 단계 도약하는 발판이 됐다. 이 공장은 나일론 경기가 퇴조하기 시작한 1970년대 중반까지 코오롱에게 꽃놀이를 즐기도록 만든 밑천이 됐다. 이렇게 쌓은 부를 바탕으로 이원만 회장은 정치에 몸을 담았으나, 성공적이진 못했다.
1977년 우여곡절 끝에 그룹 경영권을 받은 이동찬 회장은 공격경영을 펼치진 않았다. 그가 공격경영에 나서지 않은 것은 1970~80년대 화섬사업 경기가 워낙 좋았던 데다, 무리한 경쟁을 싫어하는 성격도 작용했다. 여기에 이동찬 회장의 성격도 꼼꼼해 안정과 내실을 전제로 한 ‘마라톤식 경영’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그룹 이미지를 보수적으로 느끼게 했다. 물론 이동찬 회장은 80년대 초반 인조실크 단연사, 극세사 등 신소재 섬유를 개발하고, 스포츠용품사업과 제약사업에 진출하는 등 사업다각화에 나서기도 했다.
그룹경영 전면에 나선 이웅열 회장에게 주어진 첫째 과제는 그룹의 보수적 구조를 깨는 것이었다. 그룹부회장 시절 그의 주도로 (주)코오롱정보통신이라는 회사가 세워진 것도 그런 부분의 하나였다. 이웅열 회장은 1991년 2월 그룹부회장에 오르자마자 제2이동통신사업에 참여하는 방안을 짰다.
그 결과 제2이동통신 사업자인 신세기통신에 포스코와 함께 참여했다. 그러나 당시 그룹 내에서는 이 회장의 정보통신 사업 진출을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물론 이웅열 회장이 추진한 통신사업은 결과적으로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당초 꿈을 갖고 투자했던 신세기통신 지분을 IMF사태로 빚어진 그룹의 부채를 해소하기 위해 1조6백91억원을 받고 모두 처분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회장의 등장으로 코오롱그룹 내부에 뭔가 새로운 틀을 짜기 위한 변화의 기류가 형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회장은 지금도 그룹의 전통적 사업구조와 틀을 바꾸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는 모습이다. 그는 젊은 경영인답게 자신의 목표를 21세기의 화두인 IT사업에 맞추고 있다.
그는 재계의 젊은 2세 경영인들 중 최태원 회장과 함께 가장 많은 IT 관련 벤처기업에 투자를 하고 있다. 대기업과 벤처를 묶는 신경영의 틀을 짜야 한다는 게 현재 그의 사업관인 듯하다. 이와 함께 그는 자신의 시대를 열기 위한 경영철학을 수립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창업주 시대의 경영철학으로는 급변하는 21세기의 경영환경을 수용할 수 없다는 점 때문이다.
이 회장이 새로운 환경에 맞춘 철학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한 계기는 1997년 말 불어닥친 IMF사태 때문이다. IMF사태는 한국의 모든 재벌에게 신경영 시스템을 요구했다. 이 회장도 그같은 흐름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룹회장에 오른 뒤 2년 만에 닥친 IMF는 그에게 많은 변화를 요구했다.
옛 경영의 잔재로 남겨진 1조원대에 이르는 부채는 그룹의 생존을 위협하는 칼날이었다. 그는 기업의 생존을 위해 남보다 먼저 알짜배기 재산을 팔아야 했다. IMF사태 직후 몇몇을 제외하면 코오롱을 포함한 대부분의 대기업들이 생존의 기로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으로 형제와 같던 임직원을 회사에서 내보냈다.
또 생살을 도려내는 아픔으로 알짜 회사를 팔았다. 그는 이런 아픔이 재연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은 신경영 시스템과 신경영 철학이라고 믿었다. 그는 스스로 ‘비전 창조 경영인(CVC:Chief Vision Creator)’이라고 칭하면서, 일등주의인 원앤온리(One&Only), 리치 앤 페이머스(Rich & Famous) 등의 경영철학을 만들었다. 어쨌든 이 회장의 현재 모습은 과거 코오롱의 보수적 이미지와는 다르다. 딱히 그것이 진보적이고 개혁적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지만, 새 활로를 찾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의 이런 움직임에 재계가 주목하는 것은 차세대 총수군의 선두격인 그가 어떤 성과를 보이느냐 하는 점이 향후 한국 재계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