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미스백에게는 그녀가 원하면 언제든지 그녀를 받아줄 준비가 되어 있는 듬직한 남자도 있다. 그 남자가 건네준 파카를 입은 것으로 봐서 그녀는 그를 싫어하지 않는다. 아니, 좋아한다. 그런데 그녀는 자기 따위가 무슨 결혼이냐며 그녀를 배려하고 아끼는 남자를 고집스럽게 밀어낸다. 어린 소녀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 그녀는 자기 삶을 존중하지 않고 있다.
그녀가 그렇게 사는 것은 소화되지 않는 과거가 장애가 되어 그녀의 현재를 억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감정은 과거에 얽매여 있다. 툭, 하면 그녀를 두들겨 패고 마침내 버린 엄마를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엄마가 폐암으로 춥고 외롭게 세상을 떠나 한 달 만에 발견되었다. 법적 보호자 자격으로 죽은 엄마의 시신을 보고도 그녀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 “저 여자, 대체 어떤 꼴로 죽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온 거야.”
좋은 작품이라고, 한지민의 연기가 짱, 이라고 여기저기서 얘기를 하기에 영화 ‘미스백’을 보았다. 세상에, 무슨 영화가 이리도 우울한가. 스크린이 꿈을 파는 것이라면 영화는 완전 실패다. 그런데도 여운은 길다.
늘 화가 나 있는 것은 미스백의 구원은 의외로 자기처럼 버려진 어린 소녀에게서 온다. 길거리에서 오돌오돌 떨고 있는 소녀, 늘 배를 곯고 있는 소녀, 몸 여기저기에 상처가 나있는 소녀,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 소녀가 자꾸만 눈에 밟힌다.
가족에게 학대당하는 것이 뻔한 그 아이가. 그녀는 자기를 지키듯 아이를 지킨다. 아니, 버려진 그 아이를 지킴으로써 버려진 자기를 지켜나가는 법을 배우고 있는 거다.
그 소녀 지은이는 백상아의 상처 입은 내면 아이다. 지은이를 돌보고 지킴으로써 내면 아이의 상처가 치유되고 있는 것이다. 소녀와의 연대감이 생긴 백상아가 마침내 이렇게 말한다. “나는 무식해서 가르쳐줄 것도 없고, 가진 것이 없어서 줄 것도 없어. 대신 네 옆에 있을게. 지켜줄게.”
진실은 나이를 가리지 않는 법이다. 아이도 그 사랑의 말에 공명한다. “나도 지켜줄게요.” 분명하다. 둘은 서로 지킬 것이다.
학대당하는 아이들은 자기 소리가 없다. 저항의 말이나 진실의 눈물을 흘리는 순간 돌아오는 것은 더 큰 학대이기 때문이다. 학대당하며 성장해서 학대하는 어른이 된 사람들도 울지 않는다. 성장과정에서 그들의 눈물샘이 말라버렸기 때문이다. 학대당하는 아이들, 학대 속에서 성장했기에 과거가 소화되지 않은 사람을 위해 영화가 대신 울어주고 있다. 이 영화가 학대 받아와서 학대하는 어른이 된 사람들의 거울이 되어 그들이 하는 학대가 얼마나 무섭고 위험한 것인지를 일깨워주는 등대이기를 바란다. 이제 겨우 아동학대에 관심이 생긴 우리 사회의 거울이 되기를 바란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
※본 칼럼은 일요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