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 여권에 문제라도 있나요?”
리차드 칼슨이 미소를 띠고 정중하게 물었다. 낮고 부드러우면서도 기품이 있는 목소리였다. 커다란 키에 전체적으로 호리호리한 체격이었다.
“아닙니다. 즐거운 방문이 되십시오.”
여직원 엘리사는 재빨리 여권에 스탬프를 쾅 찍어서 돌려주었다. 리차드 칼슨은 오른쪽 손에 들고 있던 모자를 머리 위에 살짝 얹듯이 쓰고 조용히 게이트를 빠져나갔다. 왼쪽 손에는 밤색 007가방이 들려 있었다.
‘세계 경제 무슨 일이 있나? 어제부터 금융계의 거물들이 룩셈부르크로 오고 있잖아?’
여직원 엘리사는 숨이 멎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1996년 6월 3일 오후 6시. 석양이 어둠을 몰고 오는 중세풍인 룩셈부르크의 고색창연한 고성에 한 대의 고급 승용차가 미끄러져 들어와 멈췄다. 차에서 내린 리차드 칼슨은 집사의 정중한 안내를 받아 미로와 같은 돌계단을 통해 요새로 이루어진 성루로 올라갔다. 성루 옆에 의외로 넓은 정원이 있어서 정원수들이 아름답게 가꾸어져 있고, 색색의 장미들이 만발해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룩셈부르크의 대성당인 노트르담 성당 첨탑이 한눈에 보이는 전망 좋은 자리에 몇몇 노인들이 둘러앉아서 한가하게 저녁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얼핏 보아서는 은퇴한 노인들이 저녁식사를 하면서 한담을 나누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의장 각하, 제가 조금 늦었습니다.”
리차드 칼슨은 원탁의 중앙에 앉아 있는 학자풍의 노인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괜찮네.”
중앙의 노인이 리차드 칼슨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머리는 온통 은발이었고 수염도 하얗게 셌다. 의장으로 불리는 노인 옆에는 40대의 아름다운 여인이 앉아 있었다. 세계 금융시장을 한 손에 쥐고 흔드는 비밀의 여인, 이름도 출신도 전혀 알려지지 않은 여인은 미국의 월스트리트에서 ‘블랙마리아’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러나 월스트리트는 그녀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나 진면목을 알고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리차드 칼슨조차 그녀의 정체를 몰랐다. 그녀는 원탁회의의 행정 조직인 유령들을 이끌고 있었다.
“서류는 잘 보았네. 한국의 금융시장이 완전히 엉망이더군. 우리가 손을 쓰면 순식간에 붕괴되겠어.”
노인의 말에 좌우에 앉아 있던 사내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습니다. 한국 금융시장을 붕괴시키면 차후에 우리가 거두어들일 수익은 1500억 달러를 능가할 것입니다.”
리차드 칼슨이 자신감에 넘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노인이 앉으라는 손짓을 했으나 감히 자리에 앉지 못하고 있었다.
“허허허.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전쟁보다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말이 아닌가.”
“예.”
리차드 칼슨은 블랙마리아를 힐끗 쳐다보았다. 한국 붕괴 프로젝트도 그녀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다. 그녀는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라크를 공격하여 무력화시킨 미국의 걸프전쟁이 끝나자마자 한국붕괴 프로젝트를 가동하고 있는 것이다.
블랙마리아는 40대지만 풍만한 몸을 갖고 있었다. 흰색의 투피스로 정장을 하고 있었고, 역시 흰색인 블라우스는 앞단추 하나를 열어놓아 희고 뽀얀 젖무덤이 절반이나 드러나 있었다. 쏟아질 듯이 풍만한 블랙마리아의 젖무덤을 본 리차드 칼슨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어떻게 저렇게 아름다운 유방을 갖고 있는 거지?’
리차드 칼슨은 여자의 풍만한 가슴을 한입 가득 입에 넣고 싶은 강렬한 유혹을 느꼈다.
“그렇다면 당연히 한국을 붕괴시켜야지.”
노인이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리차드 칼슨은 블랙마리아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원탁을 내려다보았다. 저녁 기온이 약간 쌀쌀하기는 하지만 원탁에는 최고급 요리들이 차려져 있고 하얀 드레스를 입은 팔등신 미녀들이 시중을 들고 있었다.
“프로젝트는 시작되었나.”
“예. 이미 유령을 파견했습니다.”
리차드 칼슨의 말에 원탁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일순 정적에 휩싸였다. 유령은 원탁회의에서 내린 명령을 수행하는 집행자들이다.
“한국의 경제 상황에 대해서 설명해 보세요.”
“한국의 대기업들은 오성을 제외한 재벌그룹들이 과도한 채무를 갖고 있어서 은행까지 부실화되고 있습니다. 창보그룹을 예로 들면 10조 원이나 빚을 지고 있기 때문에 한순간에 붕괴됩니다. 오성과 재벌 순위 1, 2를 다투고 있는 현도그룹은 하이네스 반도체에 과도한 투자를 하여 유동성 위기를 겪을 수 있습니다. 재벌 순위 3위를 오르내리는 대유그룹도 해외투자에 치중하고 부채 비율이 높아 우리가 목을 조이면 순식간에 해체될 것입니다. 중견 그룹인 오미, 태농, 신로를 비롯하여 한국의 대기업 100개 이상이 쓰러질 것입니다. IMF가 시작되면 부도가 나지 않은 기업도 구조조정을 단행해야 하기 때문에 거리에는 실업자들이 넘치고 주식은 휴지조각이 될 것입니다.”
리차드 칼슨은 보고를 하면서도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의 조국 아르헨티나도 금융위기 때 수많은 실업자들이 거리를 배회하고 주가가 폭락하여 자살하는 사람들이 속출했었다. 이제 한국은 전쟁보다 더욱 참혹한 경제대란에 빠질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쓰러진 기업을 이삭 줍듯이 헐값으로 인수하여 되팔면 되겠군요.”
블랙마리아의 푸른 눈에서 사악한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습니다. 한국은 우리에게 걸프전쟁보다 더 많은 이익을 가져다가 줄 것입니다.”
“IMF가 지원을 하면 한국이 이 사태를 극복하겠는가? 한국이 극복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어. 한국에서 샀다가 한국에 되팔아야 하니까 한국이 IMF 위기를 극복할 능력이 있어야 돼.”
의장이 리차드 칼슨에게 물었다.
“한국에 엘리트들이 형성되고 있기는 하지만 10년 후를 예측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고등고시라는 국가시험을 거쳐 선발되었기 때문에 미래를 예측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천박한 엘리트라고도 합니다.”
“언론은 어떤가?”
“한국에서는 기자가 되려면 입사 시험을 보아야 합니다. 그것을 언론고시라고 부릅니다. 대기자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없습니다. 선정적인 보도를 하기 때문에 언론이 오히려 우리를 지지하게 될 것입니다.”
“언론도 천박한 엘리트로군.”
의장의 말에 좌중의 노인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한국의 은행을 샀다가 팔아야 하는데 가능한가? 한국은 대부분의 은행을 국가에서 좌우하고 있지 않은가? 은행장도 국가에서 임명하고….”
국제은행 총재인 덴홀름 엘리어트가 리차드 칼슨에게 물었다.
“한국의 은행 중에서 IMF를 견딜 수 있는 은행은 백성은행밖에 없습니다. 상도은행, 한성은행은 대형은행과 통합해야 합니다. 대일은행도 외국계 은행에 매각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리차드 칼슨의 보고에 만족한 듯이 좌중의 노인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떻소, 여러분….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는 한국을 붕괴시키는 데 동의하오?”
의장이 좌중을 돌아보고 물었다.
“동의합니다.”
블랙마리아가 붉은 입술을 움직였다.
“동의합니다.”
국제은행 총재도 동의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좌중에서 유일하게 동양인인 일본의 다나카 미사토도 동의했다. 그는 일본의 사채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인물로 일본에서 하룻밤에 수십억 달러의 현금 동원 실력을 갖고 있었다. 일본인, 아니 동양인이 원탁회의에 참여하는 것은 수백 년 역사 이래 처음이었다.
“반대하는 분은 없소?”
의장이 좌중을 돌아보고 물었으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한국을 붕괴시키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겠소. 즐거운 식사를 계속하도록 합시다.”
의장의 말에 좌중이 조용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국 금융시장을 휘저어 놓을 우리의 대리인이 누구인가? 반드시 한국인이어야 하네.”
의장이 다시 리차드 칼슨에게 질문을 던졌다.
“각하, 조지타운대학의 이상희 박사입니다.”
“이상희라….”
의장이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먼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노트르담 성당 첨탑 뒤의 서편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던 황혼의 여진이 사라지면서 어둠이 서리서리 내리고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