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어떻게 된 거야? 누가 말을 해보라구. 말을 해보란 말이야!”
장학민이 중역들을 돌아보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건설 현장에서 평생을 보낸 데다가 체구가 우람해서 재계에서 불곰이라고 불리는 그가 소리를 지르자 중역들이 더욱 숨을 죽였다. 그야말로 불벼락이 떨어지기 직전인 것이다.
“왜 말을 안해. 입은 뒀다가 뭣에 쓰려고 다물고 있어? 모두 꿀 훔쳐 먹은 벙어리야?”
평소에 과묵하기로 소문이 난 장학민이 중역회의에서 역정을 내는 것은 일이 원체 다급했기 때문이었다. 중역들은 더욱 고개를 숙였다.
“일부는 회장님께서 비자금으로 쓰시고….”
자금 담당 이사 최광수가 장학민의 눈치를 살피면서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이런 개새끼, 누가 비자금을 말하랬어?”
장학민의 입에서 마침내 육두문자가 튀어 나왔다. 건설회사 십장 출신인 장학민은 과묵했으나 화가 나면 욕설이 마구 튀어나온다.
“상원건설을 인수할 때 빌린 은행대출이나 핫머니들 이자가 워낙 높아서 감당하기가 어렵습니다. 게다가 경기가 하락하고 있는 상태라 그룹 계열사 영업 이익이 바닥인 상태입니다.”
최광수가 이왕 내친김이라는 듯이 계속 말했다.
“그래서 이자도 못 낸단 말이야? 이자를 못 내서 이 꼴이야?”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영업이익이 이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슨 개 같은 소리야? 너희들이 내 회사 말아먹을 거야? 우리 그룹 직원이 몇 명인데 영업해서 이자도 못 갚아.”
장학민의 목소리가 사무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대체 이자가 몇 푼이나 된다구 못 갚는다는 거야?”
“한 달에 약 2000억 원이 이자로 나가야 합니다.”
최광수의 말에 장학민의 얼굴 근육이 푸르르 떨렸다.
“우리 그룹 빚이 얼만데 이자가 2000억 원이나 돼?”
“현재 창보철강의 대출금과 지급보증 규모는 은행권에 3조 4000억 원, 종금사 보험사 리스사 등 제2금융권에 1조 8000억 원 등 모두 5조 2000억 원 정도입니다.”
최광수의 말에 장학민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자신이 창보철강의 주인이면서 그는 5조 2000억 원이라는 숫자를 헤아릴 수 없었다. 창보철강 자본금은 1000억 원에 지나지 않았다. 장학민이 투자한 1000억 원의 52배가 빚인 것이다.
“아무튼 너희 새끼들 전부 월급 도둑이야!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우리 그룹 부도낼 거야?”
“아무래도 창보철강을….”
“너 이 새끼 나가! 포항제철이 저절로 세계적인 철강회사가 된 줄 알아? 우리도 창보철강만 완공되면 세계 10대 철강회사를 거느린다구. 그런데 이 고비를 못 넘겨서 부도를 내야 돼? 니덜이 제정신이야?”
장학민이 북치고 장구치고 떠들어댔으나 소용이 없었다.
‘우선 급한 불만 끄고 나면 대대적으로 갈아치워야지 안 되겠어.’
장학민은 임원들이 미덥지가 않았다. 맨손으로 10대 재벌그룹이 되었는데 부도 위기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부총리에게도 손을 썼고 은행장들에게도 손을 썼다. 돈을 달라면 돈을 주고 정치자금을 내라면 정치자금을 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돌아온 말은 절망적인 상황뿐이었다. 어떤 놈들이 내 돈을 모조리 훔쳐가고 있다.
‘이제는 마지막 수단을 동원할 수밖에 없어.’
장학민은 임원회의를 파하자 이상희를 만나기로 했다. KG경제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있는 이상희를 소개받은 것은 김성준 부총리로부터였다. 어느 날 골프장에 이상희를 데리고 왔기 때문에 내연의 여자인가 했으나 뜻밖에 경제학자였다.
장학민은 김성준에게 접근하기 위해 이상희에게 많은 선물을 보냈다. 장학민이 이상희를 직접 초대하여 식사를 대접하기도 했다. 이상희는 도도하고 아름다운 여자였다. 재벌그룹 회장이라고 하면 탤런트라도 주눅이 들기 마련인데 그녀는 언제나 당당했다.
‘이런 기집년과 같이 살면 얼마나 좋을까.’
장학민은 자신의 나이를 잊고 이상희 앞에만 서면 얼굴이 붉어지고는 했다. 이상희를 만나는 것은 자금 문제가 아니라도 즐거웠다. 장학민은 이상희가 김성준의 여자인지 알 수 없었으나 다이아몬드와 고급 승용차까지 선물했고 최고급 브랜드의 옷도 선물했다.
“이런 선물을 주시다니 너무 감사합니다.”
이상희는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아니오. 전혀 그렇지 않소.”
장학민은 손사래를 하여 자신의 수줍은 표정을 감추었다.
‘이 여자는 어떻게 고위층을 많이 알고 있는 거지?’
장학민은 여당 국회의원의 후원회 모임에 나갔다가 이상희가 나라구하기운동본부 기획실장인 김철호와 가까이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이상희는 보란 듯이 김철호의 팔짱을 끼고 있었다. 김철호는 거드름을 피우면서 청와대 비서관에게 무엇인가 지시를 내리고 청와대 비서관은 허리를 숙여 굽실대고는 했다. 국회의원들도 김철호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아우성이었다. 이상희에게조차 그들은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녀는 어느 사이에 정·재계의 꽃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장학민은 비서실장에게 지시했다. 소통령을 움직이려면 이상희를 동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소통령만이 위기를 구할 수 있었다.
“오늘 저녁 7시 여의도 중식당 양귀비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이내 비서실장이 보고를 해왔다. 여의도의 중식당 양귀비는 회원제로 되어 있어서 일반인은 출입할 수 없었고 회원들도 미리 예약을 해야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재벌 총수와 언론사 사주, 그리고 국회의원들도 상당한 실력자만이 회원권을 갖고 있었다.
“이 박사님은 패션 감각이 탁월하십니다.”
장학민은 이상희와 식사를 하면서 느끼할 정도의 아부를 했다.
“호호호. 회장님의 말씀은 언제나 듣기에 좋아요.”
이상희는 눈웃음을 치면서 대답했다. 목소리가 맑아서 구슬이 굴러가는 것같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실장님을 한 번 만나게 해주십시오. 이건 성의로 받아주십시오.”
장학민은 무기명 양도성 예금증서인 액면가 1억 원짜리 CD 5장이 담겨 있는 봉투를 내밀었다.
“그거야 뭐 어려운 일이겠어요?”
이상희는 봉투 안의 내용을 확인하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녀는 식사를 하면서 김철호에게 전화를 걸어 장학민과 내일 오전 중에 만날 수 있는지 물었다. 김철호가 좋다고 대답을 했다. 전화의 목소리가 장학민에게까지 들려왔다.
“실장님, 창보철강을 많이 도와주세요.”
“창보와 무슨 관계기에 이 박사가 도와주라는 거요?”
“실장님, 창보철강은 국가 기간산업이에요. 오늘 우리나라가 망하더라도 기간산업은 반드시 살려야 돼요.”
이상희는 장학민의 목적을 꿰뚫어보고 있다. 김철호가 은행장들에게 압력을 넣어 대출을 받으려는 사실을 알고 선수를 쳐서 도와주고 있는 것이다. 장학민은 식사를 하면서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창보가 마지막 발버둥을 치고 있군.’
이상희는 전화를 끊자 장학민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생글생글 웃었다. 창보철강은 자기자본이 1000억 원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 창보철강이 벌써 자기자본보다 52배나 많은 빚을 지고 있다. 물론 그 중에는 지급보증도 있지만 그것도 결국은 빚인 것이다.
‘창보가 무너지면 은행들까지 날아가겠군.’
창보가 무너지는 날이 한국에 금융대란이 시작되는 날이다. 물론 창보를 시작으로 국제금융 브로커들이 자금을 빼 가면 순식간에 붕괴된다. 시간은 분초를 다툴 듯이 빠르게 지나갈 것이다. 이상희는 장학민과 헤어져 아파트로 돌아오면서 많은 생각에 잠겼다. 거리는 사람들이 물고기가 부유하듯이 오가고 있었다. 네온사인이 화려하게 불을 밝히고 젊은 사람들이 무엇인가 즐겁게 이야기를 하면서 지나갔다. 차창으로 보이는 서울 거리의 풍경은 지극히 평화로웠다. 그들은 1년 후에 불어 닥칠 미증유의 대란을 감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창보그룹에 대한 대출은 빠르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은행들이 반발을 하고 있네.”
이상희가 김철호를 만나자 김철호는 다짜고짜 이상희를 안아서 무릎에 앉히면서 말했다.
“실장님이 전화를 하는데도 말을 안 들어요?”
이상희는 김철호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은행장들이야 내 말을 거절하지 못하지. 실무자들이 창보철강에 대출해주는 것을 반대하고 있어.”
정신이 똑바로 박힌 은행원이라면 창보철강에서 오히려 자금을 회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당연하다.
“창보철강이 얼마나 필요하대요?”
이상희는 김철호의 바지 지퍼를 내렸다.
“4600억 원.”
“그걸 한 은행에서 대출을 받으려니 어렵죠. 다섯 개 은행에서 1000억 원씩 내놓으라고 해요. 지금 전화를 걸어요.”
이상희는 그의 사무실에서 스스로 팬티를 벗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