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섹스를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나?’
장은숙은 자괴감이 들었다. 욕망을 해소하기 전에는 모든 것이 그쪽으로만 집중되다가 해소되어 버리면 후회가 뇌리를 엄습해 왔다. 최윤철이 이제 갓 스물을 넘긴 대학생이라 더욱 그랬다.
“먼저 가봐.”
장은숙은 주섬주섬 옷을 입는 최윤철에게 자기앞수표 두 장을 건네주었다. IMF 상황이라 20만 원도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최윤철이 수표를 주머니에 찔러넣고 고개를 꾸벅 한 뒤에 방을 나갔다. 장은숙은 최윤철이 나가자 샤워도 하지 않고 옷을 주워 입었다. 샤워는 집에서 해도 충분하다. 장은숙은 러브호텔을 나와 총총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모니터에 떠 있는 주식 시세표를 살피면서 매도 주문과 매수 주문을 번갈아냈다. 예상보다 높이 오른 종목은 팔고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에 나온 주식은 사들였다. 무겁게 남아 있던 욕망을 배설한 탓인지 종목을 선택하는 일이 가벼웠다. 장이 종료되자 바둑에서 복기를 두듯이 점검에 들어갔다. 오늘은 시장이 좋지 않아 27개 종목을 거래했을 뿐이었다. 마감을 친 상태에서 돈으로 환산하자 37억, 오늘 수익은 1700만 원이었다.
‘목표 수익도 못 올렸잖아?’
최윤철과 러브호텔에 발가벗고 뒹구느라고 소비한 시간 탓이었다. 그러나 욕망을 배설하지 않았으면 막대한 손해를 봤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루에 2500만 원의 수익을 내야 연말까지 50억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터였다.
장은숙은 주식거래상황을 점검한 뒤에 석간신문을 꼼꼼하게 읽었다. 특히 정치면과 경제면을 세밀하게 살핀 뒤에 샤워를 했다. 저녁식사를 한 뒤에는 내일 아침 매도할 종목과 매수할 종목을 체크했다. 물론 내일 아침 개장이 된 뒤에 시장 상황을 살피고 거래를 시작해야 했다. 텔레비전 뉴스는 항상 틀어놓았다. 북한이 핵실험을 하면 주식이 폭락하고 조류 바이러스가 나타나면 치킨체인점 관련 주식이 폭락한다. 뉴스는 주식투자를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정보이기도 했다.
“장 여사, 검은머리 외국인이 나타났습니다.”
증권회사에 근무하는 김동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것은 9시 뉴스가 한창일 때였다. 검은머리는 주식시장의 데이트레이딩을 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상 작전세력을 말하는 것이다. 장은숙도 주식투자에 열중할 때 이들에게 말려들어 많은 손해를 본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검은머리 외국인들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역으로 이용하여 이익을 챙기고는 했는데 그것을 알려주는 것이 증권회사에 다니는 김동춘이었다.
“커요?”
장은숙은 귀가 솔깃했다. 김동춘 쪽에서 먼저 전화를 걸어온 것은 드문 일이었다. 검은머리 외국인들을 잘 이용하면 엄청난 돈을 벌 수 있었다. 장은숙은 가슴이 쿵쾅거리고 뛰는 것을 느꼈다.
“그럼요. 엄청 큽니다.”
김동춘의 목소리가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러면 만날까요?”
“좋습니다. 알프스에서 만납시다.”
김동춘과 약속이 되자 장은숙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보를 제공해주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김동춘이 작업이 들어올 것이 분명했다. 알프스는 무궁화가 두 개인 동교호텔의 술집이다. 김동춘은 전에도 여러 차례 집적거렸으나 결정적인 순간에 거절하곤 했었다. 김동춘은 그곳에서 술을 마신 뒤에 룸에 올라가 그녀와 섹스를 하려고 할 것이다. 이번에는 거절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작전세력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하고 정보를 제공하는데 단순하게 사례비만 줄 수는 없을 것이었다. 김동춘과 육체관계를 맺어버리면 비즈니스는 물거품이 된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거절할 수만도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낮에 최윤철을 만나지 않는 건데…. 그러나 김동춘이 전화를 걸어올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장은숙은 속옷까지 새 옷으로 갈아입고 알프스로 나갔다. 김동춘은 이미 룸에 술과 안주를 주문해 놓고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신수가 좋아 보이네.”
장은숙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매고 앉아 있는 김동춘에게 손을 내밀었다. 김동춘은 벌써 얼굴이 불콰했다.
“나야 월급 받는 신세지만 장 여사는 뭉칫돈을 버는 사람이 아닙니까.”
김동춘이 능글거리고 웃으면서 장은숙의 섬섬옥수를 잡았다.
“전작이 있었나봐요.”
“회사에서 회식이 있었습니다. 목이나 축이시죠.”
김동춘이 장은숙의 잔에 맥주를 따랐다.
“작전을 하는 주포가 누구예요?”
장은숙은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김동춘을 건너다보았다.
“주포는 강진국입니다.”
“전주는요?”
전주는 자금을 대는 사람이었다.
“최영술이라고 룸살롱으로 돈을 번 사람입니다.”
“기술자는요?”
기술자는 대개 증권회사 직원들이었다. 작전세력이 증권회사 직원들을 동원하지 않고는 성공할 수가 없었다.
“기술자는 우리 회사 직원들입니다. 40억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술자들이 증권회사 직원들이라면 안심해도 될 것이다. 그러나 장은숙은 목표 액수가 크다고 생각했다.
“그럼 나는 얼마를 먹을 수 있어요?”
장은숙은 김동춘에게 요염하게 눈웃음을 흘렸다. 작전세력을 추격 매수하다가 그들이 매도로 돌아서는 순간에 같이 매도를 하거나 바로 직전에 매도를 하면 작전세력에 가담하지도 않고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작전세력의 등에 업혀가는 작전인 셈이었다.
“4억~5억쯤 먹을 수 있지 않을까요? 너무 많이 해먹으면 저쪽에서 눈치를 채니까 좋지 않습니다.”
김동춘이 주위를 살핀 뒤에 낮게 말했다. 4억~5억 원도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작전은 보통 열흘에서 한 달 안에 끝나는데 늦어도 한 달 만에 4억~5억을 챙길 수 있다면 막대한 수익을 올리는 것이다.
“김 과장님은 얼마를 원해요?”
김동춘은 장은숙에게서 사례비를 챙기게 될 것이다.
“장 여사님께서 주시는 대로 받아야지요.”
“한 5%면 되겠어요?”
장은숙은 10%를 각오하고 일단 낮춰서 제시했다.
“전 20%를 생각했는데요.”
김동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5%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나 때문에 과장으로 승진하고 이럴 거예요?”
김동춘은 장은숙 때문에 과장으로 승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장은숙의 막대한 금액을 김동춘이 유치한 탓에 대리에서 과장으로 승진했던 것이다.
“장 여사님. 저도 정보를 팔 사람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장 여사님에게 이런 정보를 드리는 것은 제가 은혜를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좋아요. 그럼 우리 10%로 해요.”
“15%로 하시죠.”
“10%로 해요. 내가 증권회사 옮기기 전에….”
장은숙이 다른 증권회사로 옮기면 김동춘의 회사는 막대한 수수료를 챙기지 못한다. 증권회사들은 수수료 수입 때문에 데이트레이딩을 하는 고객들에게 사무실까지 내주고 있었다. 장은숙의 협박에 김동춘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좋습니다. 그러면 보너스를 주십시오.”
“보너스?”
“지금까지 제가 장 여사님에게 원했던 것이 있지 않습니까.”
김동춘이 뜨거운 눈으로 장은숙을 쏘아보았다. 장은숙은 하얗게 눈을 흘기고 맥주를 들이켰다.
‘그래. 김동춘이가 원하면 한 번 주는 거지 뭐.’
장은숙은 김동춘의 눈이 자신의 몸을 더듬는 것을 보면서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