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호. 내가 마치 신데렐라가 된 것 같잖아?’
장은숙은 거울을 보면서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기분 좋은 흥분과 긴장감이 나르시스하게 밀려왔다.
“파티가 끝난 뒤에 이 옷을 반납해야 하나요?”
장은숙은 드레스를 입는 것을 도와주는 숍의 매니저에게 살며시 물어보았다. 이렇게 화려한 드레스를 반납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에요. 로버트 한 씨가 옷값을 모두 지불했어요.”
매니저가 예의 바르게 웃으며 대답했다.
“드레스가 얼마예요?”
“2000만 원쯤 될 거예요.”
매니저의 말에 장은숙은 속으로 놀랐다. 롱드레스를 입었으나 천이 부드러워 날아갈 것 같았다. 장은숙은 로버트 한과의 섹스에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로버트 한은 드레스 숍 앞에 차를 대기시켜놓고 있었다. 장은숙은 로버트 한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차에 올라탔다. 차 유리는 검은색으로 선팅이 되어 있었고 묵중한 승차감이 느껴졌다. 로버트 한은 장은숙의 옆에 앉아서 파티의 성격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외국인들을 소개받을 때의 예절에 대해서도 설명을 했다. 로버트 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장은숙은 점점 긴장이 되는 것을 느꼈다. 국제 비즈니스 사회의 진출은 그녀에게 새로운 인생을 경험하게 할 것이었다. 차가 미끄러지듯이 시내를 달려서 미국 대사관 관저에 이르렀다. 대문은 경찰과 미군이 삼엄하게 경비를 하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파티는 대사관 관저의 정원에서 열리고 있었다. 정원으로 향하는 길에 정장을 한 사내가 서서 초청장을 받고 있었다. 로버트 한이 초청장을 주자 검은 드레스를 입은 아가씨들이 정원으로 안내했다. 장은숙은 로버트 한의 에스코트를 받으면서 조심스럽게 걸음을 떼어놓았다. 정원으로 들어가자 넓은 잔디밭에 하얀 테이블이 배치되어 있고 30~40명의 남녀가 주위에 모여 있었다. 미국 대사의 파티라 그런지 외국인들이 많았다.
“미국 대사이십니다.”
로버트 한이 장은숙을 미국 대사에게 소개했다.
“어서 오십시오. 아름다운 숙녀 분을 환영합니다.”
미국 대사가 장은숙에게 정중한 태도로 손을 내밀었다. 장은숙이 고개를 살짝 숙이고 손을 잡자 미국 대사가 허리를 굽혀 장은숙의 손등에 키스를 했다.
“파티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장은숙은 미국 대사의 부인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로버트 한은 그들 모두와 친분이 있는 듯 정중하면서도 예의바르게 인사를 나누었다. 한국인들도 몇 명 초대를 받았는데 재벌그룹의 회장들과 금융계 인사들이었다.
“저 사람이 한국 최고의 재벌 오성그룹 회장이오.”
로버트 한이 장은숙의 팔짱을 끼고 걸으면서 프랑스 대사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오성그룹 회장 이정행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의 부친 이상철은 죽고 없었으나 한때 돈이 많다고 하여 돈상철로 불렸다. 장은숙은 이정행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작달막한 체구에 눈만이 튀어나올 듯이 부리부리한 사람이었다. 오성그룹은 자동차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선대 회장 때부터 치열한 전쟁을 벌여 왔었다. 오성그룹이 자동차 회사를 인수하기 위해 벌인 로비는 너무나 치열하여 국민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3대 자동차 메이저의 하나였던 유아자동차 인수에 실패하자 일본과 합작으로 자동차 회사를 설립했으나 빚이 많다고 하여 비난을 받고 있었다.
“오성자동차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지.”
“왜요? 오성에서 하면 뭐든지 성공하잖아요?”
“한국은 IMF 상황이오. 빚이 많은 회사는 외국에 팔아야 돼요.”
로버트 한은 정원을 한 바퀴 돌면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상도은행 은행장님입니다.”
로버트 한이 50대의 말쑥한 신사를 장은숙에게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장은숙은 은행장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성윤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은행장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요. 나는 미세스 조에게 한국의 아름다운 한복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거예요.”
로버트 한은 장은숙을 오성윤에게 맡기고 조재숙과 영어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조재숙은 의외로 영어에 능통했다.
“로버트 한 씨와 동행하셨습니까?”
오성윤은 장은숙과 둘이 남자 어색한 듯이 헛기침을 하고 말을 건넸다. 오성윤은 세련되고 중후한 인상의 사내였다.
“네. 친구예요.”
장은숙은 활짝 웃으면서 대답했다. 정원에는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 사내들이 돌아다니면서 와인을 서비스하고 있었다.
“와인 한 잔 하시겠습니까?”
오성윤이 와인 잔을 들고 장은숙에게 권했다.
“감사합니다.”
“드레스가 참 잘 어울립니다. 보통 한국 여자들에게는 드레스가 잘 어울리지 않는데요.”
오성윤이 장은숙의 풍만한 가슴께를 눈으로 더듬으면서 말했다. 장은숙은 오성윤의 눈빛에 기분 좋은 전율을 느꼈다.
“호호호. 고마워요. 행장님도 스마트하세요.”
“그렇습니까? 우리 집사람은 나에게 멋이 없다고 하는데….”
오성윤이 기분이 좋은지 너털거리고 웃었다. 이내 식사가 시작되었다. 오성윤은 장은숙을 에스코트하여 테이블에 앉았다. 식사는 스테이크 정식이었는데 차와 스프 순서로 나왔다. 호텔에서 먹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자 춤이 시작되었다. 실내악단이 잔잔한 음악을 연주하는 가운데 손님들 중 일부는 술을 마시면서 대화를 하고 일부는 춤을 추었다. 사람들이 흐느적거리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은숙, 나를 도와 줄 수 있어요?”
로버트 한이 장은숙과 블루스를 추면서 물었다.
“무엇을 도와 드려요?”
“상도은행 은행장과 춤을 춰요.”
“춤추는 일이 뭐가 어렵겠어요? 그런데 왜 그 사람과 춤을 춰야 해요?”
장은숙은 웃으면서 로버트 한을 쳐다보았다. 로버트 한이 국제 비즈니스 사회의 상당한 실력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춤을 추면서 오성윤을 당신의 포로로 만들어요.”
“포로로 만들라고요?”
장은숙은 로버트 한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는 상도은행을 인수할 겁니다. 은행장을 우리 편으로 만들면 은숙에게 막대한 리베이트를 지급할 수 있어요.”
로버트 한의 말에 장은숙은 소름이 끼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은숙, 국제 비즈니스는 냉정한 겁니다. 현명한 여자는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지요.”
로버트 한이 눈언저리에 미소를 떠올렸다.
‘이놈이 나를 이용하려고 하는구나.’
장은숙은 로버트 한의 의도를 파악했다.
“리베이트는 얼마나 줄 수 있어요?”
“기여도에 따라 다르지만 만족할 수준으로 지급할 겁니다. 나는 조재숙과 춤을 출 테니 오성윤과 춤을 춰요.”
로버트 한이 장은숙의 둔부를 살짝 두드렸다. 장은숙은 로버트 한과 떨어져 테이블로 돌아왔다. 술을 마시면서 춤을 추는 사람들을 살피자 어딘지 모르게 기괴해 보였다. IMF라 많은 국민들이 노숙자로 전락하고 실업자가 거리를 메우고 있는데도 파티는 화려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춤을 추지 않으세요?”
장은숙은 오성윤이 혼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눈웃음을 쳤다. 로버트 한의 지시 때문이 아니라 오성윤이 어쩐지 쓸쓸해 보였다. 그의 부인 조재숙은 한복을 입은 채 로버트 한에게 이끌려 블루스를 추고 있었다.
“춤을 잘 출지 몰라요.”
“제가 가르쳐 드릴까요?”
장은숙은 오성윤에게 촉촉하게 젖은 눈빛을 보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