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최가 주식을 사들이고는 있지만 대주주가 되기는 어려워.’
김광호는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회장인 빅토르 최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빅토르 최는 우즈베키스탄 정부에서 카나미스의 주식을 불하받았고 시장에서 닥치는 대로 주식을 사들여 30%에 육박하고 있었다. 이제는 오성전자에 이어 2대주주가 된 것이다. 빅토르 최는 한국인 3세였기 때문에 김광호는 그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5년 전에 김광호가 우즈베키스탄에 처음 왔을 때 아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러시아어를 전공하여 러시아어가 공용어인 우즈베키스탄에서 활동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나 정보를 전혀 모르는 상태라 일을 해나가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고려인 회장인 빅토르 최로부터 도움을 받아 아직도 사회주의 국가의 잔재가 남아 있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들은 스탈린 시대에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 사람들이었다. 소련이 해체되지 않았을 때는 어렵게 살았으나 우즈베키스탄이 독립을 하자 각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내 대부분의 한인들이 풍족하게 살고 있었다.
빅토르 최는 고려인들에게 신망을 얻고 있었고 우즈베키스탄 정부에도 많은 인맥을 갖고 있었다.
“사장님, 영국 대사 관저로 갑니까?”
운전을 하던 우즈베키스탄 기사가 러시아어로 김광호에게 물었다. 김광호는 고개를 끄덕거려 대답을 대신했다.
‘영국대사가 나를 관저로 초대하다니….’
김광호는 영국 대사의 초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문득 영국 투기자본이 최근에 카나미스의 주식을 사들이고 있다는 비서 나타샤의 보고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김광호는 영국 투기자본이 아무리 주식을 사들인다고 해도 오성전자가 47%의 주식을 갖고 있는 한 경영권을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김광호는 차창으로 흐르는 우즈베키스탄의 수도인 타슈켄트의 거리 풍경을 무연히 내다보았다. 타슈켄트는 우즈베키스탄의 북동부에 위치해 있고 해발 4000m의 고원에 있다. 남서부는 타슈켄트의 남서쪽 경계선을 이루는 시르다리야 강의 지류인 아항가란강과 치르치크 강이 흐르는 평야지대다. 대륙성기후지대로 겨울은 따뜻하고, 여름은 길고 무더우며 건조했다. 국민들은 백인들로 아랍 계열이다. 미국이나 유럽처럼 키가 크지는 않다.
“하니, 언제 오세요?”
타슈켄트의 대학생 압둘 옥산나가 전화를 걸어온 것은 김광호의 차가 타슈켄트 남쪽 지역의 고급 저택가로 들어섰을 때였다. 중앙아시아 특유의 가로수가 길을 덮고 있는 아스팔트를 달리는 것을 보면서 김광호는 기분이 좋아졌다. 옥산나는 우즈베키스탄의 전형적인 혈통을 갖고 있었다. 하얀 피부에 신비스러울 정도로 파란 눈, 그러면서도 유럽 여자들보다도 훨씬 아름다웠다. 키도 큰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엉덩이는 통통하게 살이 올라 있었고 가슴도 컸다. 아내가 마침 서울의 친정에 갔기 때문에 김광호는 지난 밤을 옥산나의 아파트에서 보냈었다. 옥산나는 그를 좋아했다. 아침에도 옥산나는 그를 끌어안고 몸부림을 치면서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했다.
“보내고 싶지 않아요. 나하고 같이 있어요.”
옥산나는 김광호의 가슴을 하얀 손으로 애무하면서 간지럽게 속삭였다.
“옥산나, 나는 회사에 출근을 해야 돼.”
“옥산나를 사랑하지 않아요?”
“옥산나를 사랑해.”
김광호는 옥산나를 좋아했다. 옥산나는 인형처럼 예쁜 아가씨였다. 이런 아가씨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떤 여자를 좋아하겠는가. 김광호는 옥산나의 희고 탐스러운 가슴을 애무했다.
“당신을 갖고 싶어요.”
옥산나가 김광호의 하체로 손을 뻗어 물건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김광호의 물건이 서서히 기지개를 켜고 일어섰다. 김광호는 옥산나의 어깨 너머로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아직 출근시간까지는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지난밤에 격렬한 사랑을 나눈 뒤에 샤워도 하지 않고 잤으므로 그들은 알몸이었다. 김광호가 옥산나를 눕히고 위로 올라가자 옥산나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옥산나는 항상 밝은 표정을 하고 있다. 돈 때문에 김광호를 만난다면 이런 표정을 짓지 않을 것이다.
“오우 내 사랑!”
김광호가 옥산나의 몸속으로 깊숙이 들어가자 그녀가 와락 끌어안았다. 김광호는 힘차게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옥산나는 김광호가 피스톤 운동을 반복할 때마다 입을 벌리고 스타카토로 끊어지는 신음소리를 내질렀다. 옥산나의 신음소리가 커질수록 김광호는 빠르게 절정을 향해 달려갔다. 옥산나를 만난 것은 회사 근처에 있는 테니스 코트에서였다. 대학 때부터 테니스를 쳤던 김광호는 우즈베키스탄에 온 뒤에도 틈틈이 테니스코트를 찾아갔다. 타슈켄트에는 테니스를 치는 사람이 많지 않았는데 김광호는 옥산나와 우연히 테니스를 같이 치면서 친해졌다.
“사장님, 관저에 도착했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영국 대사가 환하게 웃으면서 김광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초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광호는 정중하게 인사를 하면서 영국 대사의 손을 잡았다. 영국 대사가 부인을 소개했을 때는 손등에 키스를 했다. 우즈베키스탄은 날씨가 더웠기 때문에 거실에서 가벼운 티 타임을 갖고 정원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영국대사는 50대인 스위스 은행장 부부와 30대 금발여인까지 초대를 하여 정원에서 식사를 하는 사람은 모두 여섯 사람이었다.
“미스 제니스 윙거를 아시죠?”
영국대사 부인이 금발여인을 가리키면서 김광호에게 물었다. 김광호는 금발여인이 낯익다고 생각했으나 그녀를 어디서 보았는지 전혀 기억할 수 없었다. 금발여인은 서양인답지 않게 얼굴이 작고 아담한 체격이었다. 헤어스타일은 영화배우 르네 젤위거처럼 우아한 웨이브에 둥글게 말아 올린 스타일이었다. 평범한 듯하면서도 품위가 있었다. 옷차림은 베이지색의 정장이었다. 상당히 우아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여자였다. 대화는 영어로 했다. 김광호는 영어가 유창하지는 않았으나 대화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제니스처럼 유명한 영화배우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
영국 대사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김광호는 그때서야 제니스 윙거가 출연했던 영화 <헨리8세와 앤>이 떠올랐다. 제니스 윙거는 가난한 영국 귀족의 딸로 헨리8세의 부인 캐더린 왕비의 궁녀로 왕궁에 들어왔다가 헨리8세와 사랑에 빠졌으나 3년 만에 간통 누명을 쓰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비운의 여주인공 앤 불린 역할을 맡아 감동적인 연기를 했던 영화배우였다. 한국에서도 개봉되어 많은 인기를 끌었고 김광호도 제니스 윙거의 매력에 푹 빠졌었다. 그런 영화배우를 영국 대사의 관저에서 만난 것이다.
“사실 아까부터 어디서 뵌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제니스 윙거 양인지 몰랐어요.”
김광호는 새삼스럽게 제니스 윙거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제니스 윙거를 만났다는 사실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제닌이라고 불러 주세요.”
제니스 윙거가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김광호는 영국 대사의 관저에서 유쾌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식사는 우즈베키스탄 전통요리 풀코스였고 제니스 윙거는 호감이 가는 듯 김광호에게 여러 가지를 물었다. 제니스 윙거는 아항가란강 강가에 별장이 있어서 영화를 촬영하지 않을 때는 우즈베키스탄에 와서 쉰다고 말했다.
“혹시 테니스를 좋아하세요?”
“좋아합니다.”
“오우 그럼 테니스를 같이 쳐요. 언제 시간이 있어요?”
“내일 오후에는 시간이 있습니다.”
내일이 토요일이었기 때문에 오후에는 시간을 낼 수 있었다. 옥산나에게는 바이어와 중요한 상담이 있다고 하면 될 것이다. 스위스의 은행장은 김광호와 제니스 윙거를 토요일 밤에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그럼 오후에는 저와 테니스를 치고 저녁에 함께 은행장님과 식사를 해요.”
제니스 윙거가 말했다. 김광호는 제니스 윙거가 눈이 부시게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대사관저에서 식사를 마치고 헤어질 때 제니스 윙거는 김광호에게 가벼운 포옹까지 해주었다.
‘향기로운 여자구나.’
김광호는 제니스 윙거에게서 풍기는 향긋한 냄새에 또 다시 가슴이 울렁거렸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