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성물산에서 일개 차장에 지나지 않았어.’
김광호는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았다. 그는 10여 년 동안 오성물산에 근무하면서 차장이 되었고 이제는 이사였다. 한국 최고의 그룹 이사는 군대에서 별을 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지금 10억 달러에 이르는 제안을 받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것은 오성물산과 한국을 배신하는 일이었다. 카나미스가 런던증시에 상장되는 대신 한국 증시에 상장되면 100억 달러의 자금이 유치되는 것이고 한국은 그 돈으로 IMF 위기에서 벗어나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나에게 기회가 되지 않는가?’
김광호는 회사에서 많은 일을 해야했으나 제니스 윙거의 제안만 생각했다. 제니스 윙거의 제안은 절대적인 기회였다. 이런 기회는 인생에서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김광호는 집무실에 앉아서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우즈베키스탄에 와서 자신이 영국 투기자본의 표적이 되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선진국이라는 나라가 자국의 총리까지 동원하여 카나미스를 런던 증시에 상장시키려고 한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세계는 바야흐로 경제 전쟁이었다.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은 과연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있을까.
‘나는 이 기회를 잡아야 돼.’
김광호는 오후가 되자 제니스 윙거에게 전화를 걸어 시내에 있는 호텔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10억 달러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제니스 윙거는 그가 도착한 지 10분이 지나서야 핑크색 원피스를 입고 나타났다. 허리에는 붉은 벨트를 매고 있었다.
“킴!”
제니스 윙거는 활짝 웃으면서 김광호를 포옹했다. 제니스 윙거의 몸에서 좋은 향수 냄새가 풍겼다.
“제니스, 내가 할 일은 무엇이오?”
김광호는 제니스 윙거와 마주앉았다. 지난밤 그녀의 집에서 나신을 품었던 일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지난밤에 그녀는 얼마나 감미로웠던가. 처음에는 거실의 소파에서, 두 번째는 그녀의 침대에서 깊은 사랑을 나누었다.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나요?”
제니스 윙거가 다리를 포개고 앉아서 물었다.
“먼저 몇 가지 궁금한 것이 있소. 그것을 안 뒤에 결정을 내리겠소.”
“좋아요. 무엇이든지 물어보세요.”
제니스 윙거가 자신감에 차서 말했다. 김광호는 제니스 윙거가 자신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제니스 윙거는 비즈니스를 위하여 그에게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적인 영화배우가 이런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제니스, 나에게 접근한 의도가 무엇이오?”
“굳이 말을 해야 하나요?”
“당신의 진심이 알고 싶소.”
“킴, 당신은 6개월 전에 영국 자본가가 손을 잡자는 제안을 거절했어요. 그래서 영국자본가들이 나를 당신에게 보낸 거예요.”
“영국 자본가가 누구요?”
“그런 것까지 알 필요가 있나요? 그들은 전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김광호는 제니스 윙거의 뒤에 거대한 세력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에게 접근한 사람들, 영국대사, 스위스 은행장도 그들이 조종하는 것이오?”
“네.”
김광호는 제니스 윙거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할 일은 무엇이오?”
“어젯밤에도 말했지만 카나미스를 런던증시에 상장시키는 일이에요.”
“나에 대한 당신의 제안을 누가 보증하오?”
“영국 총리께서 하실 거예요.”
“이건 국제적인 음모요.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가 있소?”
김광호는 자신의 말이 공허하게 귓전을 울리는 것을 느꼈다.
제니스 윙거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다음 주에 영국에 가면 총리를 만날 수 있소?”
“물론이에요. 그래서 킴을 영국에 초대하는 거예요.”
“영국 군수공장에서 구리 수입 상담건도 나를 영국으로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오?”
“그래요.”
“정말 치밀하군요.”
“카나미스를 런던 증시에 상장하면 영국 경제는 엄청난 플러스 효과가 있을 거예요.”
“내가 제안을 거부하면 어떻게 되는 거요?”
김광호는 영국자본가들에게 조종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불쾌했다.
“오성물산의 경영권이 영국 투기자본에 넘어가요. 영국 투기자본이 오성물산을 인수하면 수많은 노동자들이 해고될 것이고 공장을 베트남이나 다른 곳으로 이전하게 될 거예요. 한국은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입을 거예요.”
“결국 오성물산은 카나미스에서 손을 뗀다는 말이군요.”
“정확해요.”
“좋소. 모든 거래에는 옵션이라는 것이 있소.”
김광호는 냉정한 판단을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당할 일이라면 많은 이익을 뽑아내야 하는 것이 장사꾼인 것이다.
“나하고 협상을 한다는 말인가요? 당신은 과연 타고난 장사꾼이군요. 옵션이 뭐죠?”
“제니스. 당신은 1년 동안 나의 정부가 되어야 하오.”
김광호의 제안을 들은 제니스 윙거가 풋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더니 김광호에게 얼굴을 바짝 기울여 킴, 당신은 귀여운 남자예요, 하고 속삭였다. 제니스 윙거의 입에서 뜨거운 입김이 김광호의 귓전으로 뿜어졌다.
“내 제안을 받아들일 거요?”
“좋아요.”
“당신은 얼마의 커미션을 받소?”
“지분 1%요.”
김광호는 제니스 윙거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김광호는 제니스 윙거에게 간단한 약정서를 쓰고 사인을 해주었다. 제니스 윙거는 김광호의 약정서를 가지고 돌아갔다. 영국자본가들에게 보고를 하기 위한 것 같았다.
김광호는 회사로 돌아왔다. 카나미스가 런던 증시에 상장되면 국제적인 기업이 된다. 서울에 전화를 걸자 오성물산이 더욱 치열한 공격을 받고 있고 오성그룹은 이를 방어하기 위해 비상이 걸려 있었다. 영국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오성그룹의 자본 흐름까지 방해하고 있었다. 금융기관을 움직여 융자를 막아 현금 유통이 어렵게 만들었다. 국세청에서는 세무조사를 할 준비를 하고 검찰청에서는 비자금 조성 혐의로 오성그룹 회장을 압박했다.
‘참으로 무서운 자들이구나.’
김광호는 서울에서 들려온 소식을 듣고 가슴이 서늘했다. 경제전쟁은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그러나 개발도상국가의 대기업은 순식간에 선진국 자본가들의 먹이가 된다. 김광호는 카나미스의 매출과 영업 이익을 산출해 보았다. 카나미스의 매출과 영업이익은 해마다 증가하여 몇 년 안에 수십억 달러의 이익을 낼 수 있었다. 탐욕스러운 영국 자본가들이 이러한 이익을 놓친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나는 이제 한국인이 아니야.’
김광호는 오성그룹이나 한국과 결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국을 이끌어간다는 파워 엘리트들이 이러한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애국자가 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있었다. 그것은 가족과 고향이었다. 가족들은 한국인을 포기하고 영국인이 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김광호는 아내를 생각했다. 그가 아내를 만난 것은 대학입시에 떨어졌을 때였다. 그해 여름 그는 재수학원에 다니다가 공부를 포기하고 동해안의 해수욕장으로 달아났다. 그가 해수욕장에서 한 일은 친구 영철과 함께 해수욕장에 놀러온 젊은 여자들을 유혹하여 옷을 벗기는 일이었다.
아내를 만난 것은 그 해수욕장에서였다.
그날은 날씨가 좋았고 여자들도 많았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온통 탄력 있는 엉덩이들과 탱탱한 가슴들뿐이었다. 그리고 쪽 뻗은 늘씬한 다리와 허리, 피어싱까지 한 배꼽들이 백사장을 휘젓고 다니는 꼴을 볼 때마다 김광호는 즐거웠다. 어중이떠중이 온갖 사람들이 몰려드는 남해안보다 물이 차가워도 동해안 해수욕장으로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