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를 그리다 겉 표지
[일요신문] 김희준 기자 = 행복우물이 유림 작가의 ‘아날로그를 그리다’ 포토·시·에세이 작품을 출판했다. 27일까지는 알라딘 인터넷 서점에서 예약 판매중이며 전국 서점에는 28일 출간 예정이다.
책에는 아름다운 사진들과 펼쳐지는 추억에 대한 소고와 공중전화, 필름카메라, 라디오, 음악감상실, LP판, 손편지, 첫사랑, 그리고 종이 위로 번지는 빛과 시간들이 그려져 있다. 날로그 감성으로 그려나간, 잊혀진 것들에 대한 재현과 올해 여성조선에 인기리에 연재된 글과 사진들이 수록돼 있다.
행복우물은 사라진 것들을 추억하는 일은 누군가를 그리워 하는 마음과 어딘가 닮아 있다. 이미 쓸모 없어진 것들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추억을 소환시켜주는 사물들은 왠지 모를 위로를 전해준다.
여기에다 사라져서 이제는 만나 보기 힘든 사물과 공간들 ‘공중전화, 필름카메라, 라디오, 손편지, 음악감상실, LP판, 폐역’을 홀로 찾아다니는 한 작가의 시선도 있다. 그녀의 눈은 예리하며 따뜻하다.
잊혀진 사물들과 공간들을 찾아 아름다운 빛으로 재현해낸다. 추억으로 여행과 위로가 필요하다면, 당신의 기억 속에서 잠들어 있던 ‘아날로그를 그려’보게 될 것이라며 책을 권하고 있다.
이병일 시인은 추천글에서 이 시대에 다시 위로를 주는 아날로그 감성, 우리 안에 숨어있던 따뜻한 추억들과 잊혀질 뻔한 삶의 결들을 아름다운 빛과 글로 담아냈다고 소개했다.
책의 저자 유림은 사진을 찍고 글을 쓰는 작가다. 세계 곳곳에 조심스레 한발씩 내딛고 여행을 하다 보니 무겁고 귀찮게 느껴지던 카메라와의 동행이 행복해지기 시작해 이 책을 내게 됐다. 그는 비평상을 수상한 바 있고 동아국제사진공모전에서 두각을 나타낸 이후로 사진과 글을 함께 선보이기로 했다.
아래는 책 본문에 담긴 내용 가운데 일부를 발췌해 옮긴 글이다.
몇 십 분마다 판을 갈아야 하는 수고스러움을 감수하면서도 LP 음악을 즐겨 듣는 이유는 아날로그 음원만의 매력 때문이다. 지글거리는 먼지 소리도 이따금 같은 자리를 맴돌며 투닥거리는 바늘 소리도 음악이 된다.
오랜 시간 촘촘히 쌓아 올린 것들은 쉬이 무너지지 않는다. 밀도가 높을수록 층 간의 균열이 적기 때문이다. 공든 탑은 꼭 큰 탑일 필요가 없다.
어떤 이의 기억은 찌든 얼룩처럼 지우려 할수록 자꾸만 번져버린다. 어떤 이의 기억은 숨처럼 평생을 함께 드나든다. 누군가를 떠나며 남긴 나의 기억은 어떤 것들이었을까.
90년대 후반, 동인천역 부근에는 ‘심지’라는 음악감상실이 있었다. 좁은 계단을 힘겹게 올라 4층에 들어서면 쿵쾅거리는 사운드와 함께 심장도 요동치기 시작했다. 어둑한 공간에 들어서면 정면에 대형 스크린이 놓여있었고 극장형 좌석이 배치되어 있었다. 우측 코너에는 VJ 부스가 있었는데 그 앞에 하얀색 메모지와 연필을 비치해두고 듣고 싶은 곡을 신청할 수 있게끔 했다.
흑백사진은 인생과도 닮았다. 늘 노력 한만큼의 대가가 따라온다는 것, 우연한 순간으로 인해 예측하지 못한 결과를 맞닥뜨리는 것, 그리고 문명의 이기에 기대어 잃어버리는 것 또한 그러하다.
운수 좋은 날도 있었다. 좋아하는 가수의 뮤직비디오가 여러 차례 나오거나 꼬깃꼬깃 접어 넣은 신청곡이 뽑히는 날 같은 극장처럼 상영시간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음악다방처럼 차를 시켜야 할 필요도 없었다.
봉숭아물은 마르고 거친 손을 예쁘게 보일 수 있는 천연의 미용 재료였다. 첫눈이 내릴 때까지 봉숭아물이 남아있으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속설 때문에도 여름이면 너 나 할 것 없이 봉숭아 꽃잎을 따러 다녔다. 사랑의 열병에 빠진 사람들의 손은 모두 붉었다.
나는 과연 헤어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아름답게 살 수 있을까. 내가 남긴 기억의 조각들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지를 않기를 바랄 뿐.
어쩌면 그때부터인 것 같다. 풍경이고 사람이고 들여다보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지금도 종종 우물 안을 들여다보듯 내 안을 깊숙이 들여다본다. 나 역시 그 시절 우물처럼 빠져 있는 것들에 따라 매번 다른 냄새 다른 모습이다.
한때는 외로워 술을 찾았고 그로 인해 더 외로워진 적도 있다. 술자리에서 만난 사람과는 술 때문에 헤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좋은 사람들과의 술자리는 늘 즐겁다.
소설가 박상륭 선생의 표기를 따르면 ‘아름다움’이란 ‘앓음다움’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즉, ‘앓은 사람답다’라는 뜻으로 고통을 앓거나 아픔을 겪은 사람, 번민하고 갈등하고 아파한 사람다운 흔적이 느껴지는 것이라 했다.
지금도 가끔 그때가 그리운 것은 첫사랑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유 없이 볼이 발그레 지던 그 시절 나를 그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버지, 가난, 잃어버린 꿈. 깊숙이 묻어뒀던 말들을 건져 손 위에 올려놓았다. 죽은 듯 늘어져 있던 말들이 살아나 달리기 시작했다.
장례 기간 동안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 않는 나를 보고 가족 중 누군가 독하다 했다. 발인까지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한낮이었다.
ilyo3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