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후반 이상의 한국 남자들에겐, 동네 후줄근한 동시 상영관에서 숨죽이며 그녀의 알몸을 훔쳐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혹은 시장 근처 리어카에서 파는 조악하게 인쇄된 소설 <개인교수>를 사서 숨죽이며 읽었던 추억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만화 가게의 밀실이나 역 근처 다방에서 지직거리는 화면으로 <엠마누엘>을 본 사람도 꽤 될 것이다.
실비아 크리스텔은 1980년대 남성 하위문화의 음습한, 하지만 거역할 수 없는 치명적 매력의 뮤즈였다. 그녀는 남성들에게 모든 것을 허락하는 여자였고, 어떨 땐 원하는 것 이상으로 허락하는 여자였다.
하지만 그 삶을 살펴보면 영화 속에서 그녀가 보여주는 이미지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 있음을 알 수 있다. 1982년에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실비아 크리스텔에게 ‘섹스’와 ‘사랑’은 고통스러운 그 무엇이었다. 그녀의 부모는 여관을 경영했는데 크리스텔은 9세 때부터 여관에 드나드는 어른 손님들에게 성추행을 당했다. 그녀가 14세 되던 해 아버지는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나 집을 나가 버렸고 16세 때 돌아온 아버지는 크리스텔과 그녀의 어머니와 여동생을 쫓아냈다.
성적으로, 도덕적으로 붕괴된 환경에서 자란 크리스텔. 하지만 아이로니컬하게도 그녀는 매우 엄격한 종교적 교육을 받았고 이러한 이율배반은 그녀의 연기에서도 드러난다. 첫 작품이자 전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 준 <엠마누엘>에서 실비아 크리스텔은 내면의 욕망과 사회적 관습 사이에 있다. 그녀는 본능을 좇아 일탈적인 성을 즐기지만 한편으론 죄 의식을 느끼는데 이러한 갈등을 표현하는 그녀의 모습은 단순한 연기 이상의 리얼리티가 있으며, 여기엔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겪었던 삶의 주름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어린 시절엔 선생님이 꿈이었지만 크리스텔은 10대부터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웨이트리스, 비서, 주유소 직원 등을 전전하며 댄서의 꿈을 키우던 그녀는 17세부터 모델 일을 하게 되고 21세 때 ‘미스 유럽’에 뽑히면서 영화배우가 된다. 단돈 6000달러를 받았던 첫 영화 <엠마누엘>은 엄청난 신드롬을 일으켰고 다음 해 속편의 개런티는 10만 달러로 뛰었다. 유럽 최고의 섹시스타가 된 것이다.
이후 그녀의 캐릭터는 지나치게 느껴질 만큼 고정되었다. 크리스텔은 영화 속에서 항상 성적 각성을 느끼는 여성이었다. <줄리아>(1974) <보디 게임>(1975) <파리 매춘>(1976) 등에 이어 1980년대엔 <채털리 부인의 사랑>(1981)이 있었다. 그녀의 명성은 미국까지 전파되어 <개인 교수>(1981)는 5000만 달러가 넘는 빅 히트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 영화에서 크리스텔은 사춘기 소년의 욕망을 완벽하게 충족시켜주는 여성으로 등장하며 틴에이저의 판타지 여신의 자리에 등극했다. <마타 하리>(1985)에 이어 1992년엔 정인엽 감독의 <성애의 침묵>에 출연하기도 했던 그녀는 이후 TV에서 엠마누엘 캐릭터를 반복하며 연명했다.
네덜란드어, 영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 5개 국어에 능통하며 IQ 164의 수재였던 크리스텔을 배우로 만든 건 부도덕한 아버지에 의해 만들어진 비극적 가정환경이었다. 이후 배우로서 성공하긴 했지만 크리스텔은 줄곧 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에 시달렸고, 그 결과 그녀는 항상 아버지뻘의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20대 초반엔 27세 연상의 작가 휴고 클라우스와 연인이었고 그녀를 미국으로 이끌었던 배우 이안 맥쉐인은 10세 연상이었다. 첫 정식 결혼을 한 미국의 사업가 앨런 터너와는 5개월 만에 파경을 맞이했고 1986년엔 영화감독 필리페 블로트와 결혼했으나 5년 만에 이혼했다. 부성 결핍은 그녀를 마약과 알코올 중독에 빠지게도 했다.
현재는 벨기에에서 화가로 활동하며, 단편 애니메이션을 연출해 영화제에서 수상하기도 한 실비아 크리스텔. 그녀의 삶은 영화보다 훨씬 더 극적이었고, 그녀의 육체는 영화산업에 의해 철저히 착취되고 소비된 후 버려졌다. 만약 그녀의 데뷔작이 <엠마누엘>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그녀는 훨씬 더 다양한 역할에서 자신의 재능을 선보일 수 있었을 것이다.
김형석 영화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