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14일 프로야구인들의 모임인 일구회는 각 언론사에 인터넷 야구게임 ‘슬러거’ 운영사인 네오위즈게임즈를 상대로 법원에 10억 원 규모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일구회는 보도자료에서 “네오위즈게임즈에 회원들의 성명 등을 무단으로 침해한 것에 대해 사과 및 문제 해결을 위한 협의를 수차례 촉구했으나, 불성실한 자세로 일관하며 은퇴 선수들의 권리를 계속 침해해 부득이 소송을 제기했다”고 밝혔다.
초상사용권 문제가 새롭게 불거진 건 지난해 6월이었다. 전 LG 투수 이상훈이 “마구마구, 슬러거 등 야구게임들이 무단으로 내 이름과 캐릭터를 사용하고 있다”며 “이를 당장 중단할 것”을 언론을 통해 요구한 것이다. 당시 마구마구의 운영사인 CJ인터넷과 슬러거의 네오위즈게임즈는 “한국야구위원회의 마케팅 자회사(KBOP)와 라이선스를 맺었기 때문에 이상훈의 이름과 캐릭터를 쓰는 건 법적 하자가 없다”며 이상훈의 요구를 묵살했다. 그러나 게임사들은 얼마 못 가 현역 선수들과 달리 은퇴 선수의 초상사용권은 KBOP에 아무런 권리가 없음이 드러나고 법조계도 “은퇴 선수들의 초상사용권은 따로 계약할 사안”이라고 밝히자 태도를 바꿔 지난해 말부터 해결책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일구회가 네오위즈게임즈에 10억 원 규모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한 건 그러나 게임사들이 은퇴 선수 초상사용권 문제 해결에 소극적으로 대처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두 가지 의문이 든다. 야구인들의 친목모임인 일구회가 무슨 대표성으로 소송을 제기했느냐는 것과 CJ인터넷은 놔두고 하필 네오위즈게임즈에만 소장을 보냈느냐는 것이다.
1991년 발족한 일구회는 당시만 해도 전직 프로야구 감독들의 친목모임에 불과했다. 1990년대 중반 전직 코치, 선수, 프런트, 해설가, 캐스터들에게 문호를 개방하며 외형을 확장시켰지만, 여전히 모임 수준이었다. 그러던 것이 지난 1월 27일 사단법인으로 출범하며 자신들을 ‘전직 프로야구선수들을 대표하는 단체’로 표방하기 시작했다. 산하에 은퇴선수협의회를 만든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전·현직 감독을 포함해 250여 명에 불과했던 회원 수는 현재 600여 명으로 늘었다.
일구회 구경백 사무총장은 “누가 은퇴 선수의 대표자인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라며 “은퇴 선수 대다수가 일구회 회원이고 그들로부터 게임사와의 초상사용권 협상 권한을 위임받았기 때문에 (일구회가 나서) 소송을 제기한 것일 뿐”이라고 밝혔다. 네오위즈게임즈에만 소송을 제기한 것에 대해선 “CJ인터넷과는 20번이나 만나 은퇴 선수 초상사용권 문제를 해결하고자 머릴 맞댔으나 네오위즈게임즈는 만남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며 책임이 네오위즈게임즈 측에 있음을 분명히 밝혔다.
그러나 야구계 일부에선 “일구회와 CJ인터넷이 심상치 않은 관계”라며 의혹의 눈초리를 보낸다. 한 야구 인사는 “일구회의 소송비용을 CJ인터넷이 부담한다는 소리가 있다”며 “CJ인터넷이 일구회를 조종해 경쟁사 네오위즈게임즈를 고사시키려는 게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구 총장은 “악의로 가득한 소문”이라고 일축했다. “일구회는 네오위즈게임즈가 협상에 긍정적인 자세만 보이면 당장 소송을 철회할 의사가 있다”고 강조했다. CJ인터넷이 네오위즈게임즈와의 소송비용을 댔다는 지적도 “논평할 가치도 없는 소설”이라고 했다.
구 총장을 포함한 일구회 관계자들은 소문의 진원지를 선수협으로 본다. 일구회의 한 회원은 “슬러거와 밀월관계에 있는 선수협이 이번 소송 이후 극도로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며 “일구회가 소송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따로 있다”고 귀띔했다. 바로 “최근 은퇴 선수들이 네오위즈게임즈로부터 수억 원을 배상금으로 받았기 때문”이란다. 다시 말해 ‘누군 주고 누군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난해 8월 5일 박정태, 마해영, 진필중 등 13명의 전직 야구선수들이 야구게임사 4곳을 상대로 “본인들의 허락 없이 초상사용권을 무단으로 사용했다”며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이 선수들의 소송을 대리한 곳이 선수협이었다. 소송을 당한 게임사들은 하나같이 잘못을 인정했다. 그러나 해결방안은 각기 달랐다. CJ인터넷은 해당 은퇴선수들을 모두 만나 개별적으로 계약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무리라고 판단, 일구회와 접촉을 시도했다.
야구계에선 그동안 친목단체에 그쳤던 일구회가 사단법인으로 재출범한 것도 향후 ‘대표성 논란’을 막으려는 사전 정지작업이었다고 평가한다. CJ인터넷은 지난해 12월 일구회 시상식에 5000만 원을 지원하는 등 일구회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네오위즈게임즈가 선택한 해결방안은 무엇이었을까. 일구회의 한 회원이 밝혔듯이 배상이었다. 최근 네오위즈게임즈는 선수협에 10억 원을 배상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가운데 2억 원가량이 소송에 참가했던 33명(소송제기 후 20명 추가)에게 분배된 것으로 확인됐다. 선수협 권시형 사무총장도 이를 인정했다.
권 총장은 “잘못은 시인하면서도 여전히 금전적 보상에 난색을 나타내는 CJ인터넷과는 달리 네오위즈게임즈는 깊은 반성과 함께 2009년까지 전·현직 선수들의 초상권을 무단 사용한 대가로 10억 원을 배상했다”며 “10억 원 가운데 소송비용과 선수협 기금을 제외한 1억 3000만 원을 소송에 참가한 전직선수들에게 골고루 지급했다”고 밝혔다.
권 총장은 일구회의 네오위즈게임즈 소송을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다. “정작 금전적 배상을 하지 않은 업체는 두둔하고, 배상한 업체에 소송을 거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게 권 총장의 입장이다.
그러나 일구회에선 “되레 네오위즈게임즈와 선수협이 필요 이상으로 밀착해 있다”며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일구회의 한 회원은 “지난해 말 CJ인터넷이 KBOP와 4년간 초상사용권 독점계약을 체결하며 네오위즈게임즈는 내년부터 선수들의 실명을 쓸 수 없게 됐다. 이 때문에 네오위즈게임즈가 선수협을 끌어들여 CJ인터넷의 독점계약권을 무효로 하거나, 자신들도 초상사용권을 가질 수 있도록 로비를 시도하려는 게 아니냐”고 주장했다.
한 원로야구인은 “일구회와 선수협이 게임사들을 대신해 진흙탕 싸움에 뛰어든 꼴”이라며 “도대체 전직 선수들의 라이선스비가 얼마나 되기에 이렇듯 반목을 거듭하는지 모르겠다”며 혀를 찼다. 게임업계는 CJ인터넷과 일구회가 진행 중인 전직 선수 초상사용권료가 15억 원 이상에서 형성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박동희 스포츠춘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