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아공 현지에서 단독 인터뷰를 가진 홍명보는 “쉽지 않겠지만 선수들이 경기를 즐겨야 한다”고 주문했다. |
―남아공에 오면서 좀 허전하지 않았나? 선수단과 함께 이동하는 게 아닌 혼자 오는 게 어색했을 것 같다.
▲축구를 시작하고 월드컵 무대를 밟게 된 이후 지난 2006년 독일월드컵까지 내 인생은 월드컵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그러다 이렇게 자유로운 신분으로 월드컵이 열리는 지역을 방문하게 되니 묘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전과 달리 발걸음이 가볍기도 하고 또 어색하기도 하고…, 뭐 그렇다고 해서 다시 월드컵 무대에서 뛰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아니다(웃음). 월드컵은 나한테 큰 영광이었고 좋은 시간들이었다. 한 발 떨어져서 보면 그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느낄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어느 월드컵이 가장 기억에 남나. 남아공에 와서 만난 한인들 대부분은 2002년 월드컵 스페인전에서 홍명보 감독이 찬 마지막 킥을 가장 인상적이고 행복했던 골로 기억하더라.
▲물론 나 또한 2002년 월드컵이 내 월드컵 역사 중 가장 화려했던 것으로 기억에 남는다. 스페인전은 어찌 보면 가장 힘든 순간이었고 또 가장 짜릿한 승부이기도 했었다. 개인적으로 처음 월드컵 무대를 밟았던 90년 이탈리아월드컵을 잊을 수가 없다.
―2006독일월드컵 때는 선수가 아닌 코치의 신분으로 월드컵에 참가했다. 월드컵을 보는 시각이 다르다보니 선수 때와는 월드컵 무대에 선 느낌에서 차이가 나지 않았나.
▲당시엔 코치로서 선수들한테 뭔가를 가르친다는 생각보다는 아드보카드 감독, 핌 베어벡 코치 등 감독, 코칭스태프와 선수들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선수 때와 코치가 돼서 월드컵을 대하는 입장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굉장히 소중한 경험이었다.
―월드컵이 열릴 때마다 첫 경기의 중요성은 항상 강조되는 부분이었다. 독일월드컵 때도 토고와의 첫 경기를 앞두고 많은 의견들이 대두됐었다. 지금에서야 밝히는 당시 대표팀 분위기에 대해 설명을 해 본다면? 토고가 워낙 도깨비 같은 팀이라 준비하는 데 애로 사항이 있었을 것 같다.
▲그 당시 토고와의 첫 경기를 앞두고 가나와의 평가전에서 0-3으로 졌기 때문에 팀 분위기가 침체됐던 건 사실이다. 다른 대회도 아닌 월드컵 직전의 평가전에서 큰 점수 차로 진 부분이 선수들한테 영향을 미치는 듯했다. 그러나 코칭스태프는 걱정하지 않았다. 선수들의 심리가 빨리 회복될 수 있도록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도록 노력했다. 가장 중요한 건 월드컵을 얼마나 즐길 수 있는지다. 이전에는 선수들한테 강한 정신력만 요구했다. 그게 최선의 방법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결과적으로 모두 다 힘든 월드컵이 되지 않았나. 지금 선수들한테는 월드컵이 즐기는 무대다. 그래야 날고 기는 세계적인 스타플레이어들이 즐비한 월드컵 무대에서 당당히 맞설 수 있게 된다. 쉽지 않겠지만 선수들이 마음의 긴장을 풀고 이 시간들을 마음껏 즐겼으면 좋겠다.
▲ 캐리커처=장영석 기자 |
▲사실 선수들이 기자들한테는 편하다고, 긴장을 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속으론 시합을 준비하는 과정이 긴장되고 굉장한 압박감에 시달리는 게 사실이다. 그래도 경험 많은 선수들이 대부분이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월드컵대표팀 주장이 박지성이다. 홍명보 감독도 대표팀에선 줄곧 주장을 맡았는데 월드컵에서 주장 완장을 차는 게 어떤 의미를 전해주나.
▲어느 대회보다 강한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박)지성이가 주장을 맡고 있는 지금은 내가 주장을 할 때랑 많이 다른 것 같다. 나보단 나이가 어린 만큼 어린 선수들한테 좀 더 편안하게 다가가지 않을까 생각한다. 최고 막내였던 선수가 어느새 주장을 맡고 있는 걸 보면 세월이 많이 흐르긴 흐른 것 같다. 그러나 지성이는 대표팀 주장으로서 충분한 자격이 있다. 어느 선수보다 훌륭히 그 역할을 소화해 낼 것이다.
―박지성 선수한테 이번 월드컵이 마지막 월드컵이 될 것 같다. 본인이 더 이상 월드컵 무대에서는 뛰지 않겠다고 밝힌 바 있기 때문이다.
▲많은 고민 끝에 결정한 부분일 것이다. 워낙 준비가 철저한 선수라 월드컵 무대가 아닌 클럽 선수로서의 삶도 잘 계획하고 있으리라 본다. 하지만 한국 축구에 언젠가는 지성이가 필요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게 어떤 형태의 모습이든지 말이다.
―홍명보 유상철 김태영 최진철 등 한국 수비진의 막강한 멤버들이 모두 은퇴한 대표팀에서 수비가 가장 불안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혹시 (기자들과) 같은 시선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렇게 따지면 불안하지 않은 포지션이 없다. 수비수는 팀의 가장 중요한 위치임은 사실이다. 수비가 잘 되었느냐, 안 되었느냐에 따라 강팀인지, 강팀이 아닌지 평가받는다. 이전부터 지금 대표팀 수비수들이 경기하는 걸 지켜봐 왔다. 경기력이 떨어질 때도 있었지만 충분히 믿음이 가는 선수들이다. 마지막 평가전으로 치렀던 스페인전을 보면서 세계 최고의 팀과 경기하는데 있어 우리가 어떤 형태의 월드컵을 치러야 하는지 답을 준 것 같았다. 월드컵 동안 충분히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팀이 한국대표팀이라고 생각한다.
홍명보 감독은 월드컵을 치르는 대표팀에게 행여 자신의 말 한마디가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싶어 대답하는 걸 굉장히 조심스러워 했다. 그러면서도 월드컵 조별리그 첫 경기인 그리스전의 승패가 한국대표팀의 16강 진출의 운명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경기라고 꼽았다. 마지막으로 대표팀 후배들에게 응원 메시지를 보내달라는 요구에 홍 감독은 “자기 인생에서 가장 좋은 추억을 쌓는, 가장 잊지 못할 월드컵으로 만들길 바란다”는 의미있는 말을 남겼다.
다음날, 그리스전이 열리는 포트엘리자베스 공항에서 다시 마주친 홍명보 감독. 여행 가방에다 청바지, 운동화 등 캐주얼 차림으로 포트엘리자베스를 방문한 그는 정말 편안한 마음으로 월드컵을 느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정작 그리스전이 열린 넬슨만델라베이 경기장에서는 어느 누구보다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경기를 지켜보는 그의 눈은 매우 날카로웠고 선수들의 플레이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했다. 홍명보의 월드컵은 형태만 달라졌을 뿐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다.
이영미 기자 포트엘리자베스=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