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에로 영화의 전성기를 이야기할 때 종종 지나친 ‘여배우 중심주의’에 빠지곤 한다. 사실 무리는 아니다. 당시의 영화는 여성의 육체에 대한 관음적 관심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고, 남자 배우들은 그녀들을 벗기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에로 남자 배우’의 지형도가 가능한 건 이대근을 필두로 한 일군의 배우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엔 남자 배우들도 육체적 매력으로 어필해야 했으며 몇몇 배우들은 나름의 섹슈얼리티로 작은 춘추전국시대를 이루고 있었다. 이대근은 코믹하면서도 비현실적인 성적 파워를 내세웠고, 임성민은 수려한 외모와 함께 파멸해가는 남성상을 보여주었다. 신일룡과 김추련은 쾌남 이미지로 멜로와 에로의 중간지점에 머물렀으며, 하재영과 최윤석은 보헤미안적인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마흥식은 어떨까. ‘야성의 남자’였다. 그는 <반노>(1982)에서 욕망의 밑바닥까지 내려갔고, <훔친 사과가 맛이 있다>(1984)에선 집요한 변태성을 보여주었다.
1948년에 태어났고 서라벌예술대학을 졸업한 그는 영화 이전에 연극과 텔레비전에서 10년 넘게 내공을 쌓은 배우였다. 그 시작은 연극이었다. 고인이 된 전설의 연극인 추송웅(배우 추상미의 아버지)과 <도둑들의 무도회>(1970)에서 공연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그는 연극에서의 성과를 바탕으로 1974년에 MBC 드라마 <얼굴>에 출연하면서 브라운관으로 진출한다. 그는 빠른 시간 안에 유망주로 떠오른다.
하지만 그는 1970년대 중반에 여자 문제로 스캔들을 일으켰고 그것은 구속이 될 정도로 높은 강도였다. 복귀하려 했으나 1977년 방송사는 그에게 ‘1년 동안 방송 중지’라는 중징계를 내렸다. 탤런트로서 누렸던 3년의 짧은 인기. 그는 그렇게 TV 드라마를 떠났고 다시 연극계로 돌아갔다(이후 1990년대 중반까지 그는 꾸준히 무대에 섰다). 그리고 이때 영화가 찾아왔다.
1980년대 초 충무로는 과거와는 다른 이미지의 배우를 찾고 있었다. 한쪽에선 안성기와 같은 리얼리즘 스타일의 배우들이 진출했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선 에로티시즘의 원초적 느낌을 전달할 수 있는 배우가 필요했다. 그런 면에서 마흥식에게 <반노>는 운명적인 영화였다. 7년 동안의 법적 공방 끝에 외설이 아닌 예술로 판정받았던 염재만의 소설을 영화화한 <반노>에서 그는 여성에게 성적으로 갈취당하는 남성으로 등장한다. 영화의 절반가량이 섹스신인 이 영화는 같은 해에 나온 <애마부인>보다 훨씬 더 성적인 영화였으며 보름 이상 단식하며 피폐한 느낌을 드러냈던 마흥식은 이후 충무로의 섹스 심벌로 떠오른다.
그는 여배우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반노> <반노 2>(1984)의 원미경, <산딸기 2>(1984)의 선우일란, <탄드라의 불>(1984)의 오혜림 등은 마흥식을 딛고 에로틱한 이미지로 급부상했다. 한편으로 그는 여성을 위협하는 이미지였다. ‘변태남’ 연기가 돋보였던 <훔친 사과가 맛이 있다>나, 야구선수로 등장해 유부녀를 유혹하는 <김마리라는 여인>(1983)이 대표적인 예. 하지만 그의 개성이 가장 잘 살아나는 장르는 <산딸기 2> <태>(1985) <물레방아>(1986) <들병이>(1989) 같은 토속 에로였다. 이 영화들에서 그는 순박하면서도 듬직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그가 이대근과 확연히 구분되는 지점이다. 이대근의 능청스러운 캐릭터가 여성을 성적으로 굴복시킨다면, 마흥식의 캐릭터는 좀 더 소극적이고 기다리면서 감정을 응축시킨 후 정사신을 맞이한다.
<매춘>(1988)의 기둥서방 역할 이후 에로티시즘 영화가 쇠락하고 충무로가 서서히 체질 개선을 하게 되면서 마흥식을 영화에서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점점 줄어들었다. 그의 베드신 테크닉이 빛을 발했던 <모스크바에서 온 여인>(1993)에서 러시아 배우 올가 카보와 공연했던 것이 그의 실질적인 마지막 에로 이미지. 어느덧 환갑을 넘었을 그의 모습이 어떨지 궁금하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