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합뉴스 |
경기 후 믹스트존(공동취재구역)에서 만난 이동국의 멍해 보이는 표정은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인터뷰를 하면서도 시선은 천장을 향해 있었고 “모든 게 허무하다”는 대답 속에는 그의 절절한 심정이 함축돼 있었습니다. “이 순간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해왔나 싶다. 여기까지 오게 된 과정들이 스쳐지나간다. 좀 정리할 시간 필요하다”는 말을 남기고 곧장 믹스트존을 빠져나가는 이동국의 뒷모습이 가슴을 애잔하게 만드는 이유가 뭘까요.
선수들보다 앞서 믹스트존에 들어선 허정무 감독은 기자들과 인터뷰 도중 눈가에 이슬이 맺히기도 했습니다. 그 역시 자꾸 뒤를 돌아보게 하는 아쉬움과 허전함 때문이었습니다. 2년 넘게 월드컵을 향해 앞만 보고 달려왔던 허 감독으로선 8강 진출이라는 고지가 바로 눈앞에 있었는데 그걸 넘지 못하고 물러서야 하는 심정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이런저런 비난과 비판 속에서도 국내 감독으로서 사상 첫 원정 16강 진출을 성공시킨 부분은 인정받아야만 할 것 같습니다.
제 앞으로 안정환 이운재가 지나갔지만 잡지 못했습니다. 무슨 할 말이 있을까요. 자신들의 마지막 월드컵 무대에서 단 1분도 그라운드를 밟지 못하고 돌아가는 선수들에게 무슨 질문을 해야 했을까요. 김남일한테는 ‘수고 많았다’고 인사를 전했습니다. 나이지리아전 때 페널티킥을 받은 그로선 한동안 마음이 상당히 복잡했을 겁니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선수들을 독려하고 챙기는 모습을 보면서 그가 이번 월드컵을 끝으로 대표팀을 은퇴한다는 게 너무 아쉽기만 하네요.
우루과이전이 끝나고 그라운드에 대자로 뻗어 통곡을 했던 차두리. 이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큰 무대에서 뛰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충전만 하면 평생 축구선수로 지치지 않고 뛰어다닐 것만 같은 그도 어느새 서른 살 넘은 아이 아빠였습니다.
이영표는 마지막 월드컵 무대에서 자신이 세운 두 가지 목표를 이뤘기 때문에 조금은 만족한다는 얘기를 전했습니다.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고 뛰면서 꼭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2002년 한국에서 월드컵 4강 진출을 이뤄낸 것이고 남은 하나는 원정 월드컵에서 16강 진출에 성공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월드컵이 끝나니까 형언 못할 아쉬움이 물밀 듯이 밀려온다.”
그동안 대표팀 은퇴에 대해 말을 아끼는 이영표였지만 남아공월드컵 대표팀 마지막 경기에서 이영표는 확고한 목소리로 월드컵은 물론 대표팀에서도 물러날 뜻을 밝혔습니다.
기성용의 표정은 착잡해 보였고 목소리는 힘이 빠진 듯했지만 그동안 소속팀에서 벤치 신세에 머물렀던 상황을 떠올리며 “만약 팀을 옮길 수 있다면 주전으로 뛸 수 있는 팀으로 가고 싶다”는 말로 슬쩍 자신의 거취 문제를 거론했습니다.
동점골을 터트린 이청용을 만나려고 많은 시간 동안 믹스트존에 머물러 있었지만 끝내 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더군요. 나중에 알고보니 골키퍼 정성룡과 함께 도핑 검사에 불려갔다고 합니다. 정성룡은 나이지리아전을 제외하고 3게임이나 도핑 테스트를 받았네요. 도핑테스트 선수가 어떻게 정해지느냐고요? 뽑기입니다. 정성룡은 세 번이나 뽑힌 것이고요.
태극전사들의 월드컵 잔치는 이제 끝이 났습니다. 그들을 좇아 요하네스버그 루스텐버그 더반 포트엘리자베스를 돌아다닌 저 또한 대표팀 선수들과 함께 한국행 비행기에 오릅니다. 드디어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는 거죠. 아쉬움 회한 미련 그리고 기쁨과 보람 등의 단어로 정리할 수 있는 2010남아공월드컵이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했습니다. 바로 도전과 가능성입니다.
포트엘리자베스에서
“나의 월드컵은 끝났다”
“지금 당장 언제쯤 대표팀에서 은퇴를 하겠다고 말할 수는 없다. 분명한 건 이번 월드컵이 나한테는 마지막 월드컵이라는 사실이다.”
박지성에게 ‘진짜 마지막 월드컵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주저없이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다음은 박지성과의 일문일답 내용이다.
―이번 월드컵을 통해 한국대표팀이 보완해야 할 점이 있다면.
▲우리가 강팀이 되려면 지금보단 수비가 더 강해야 한다. 그리고 더 많은 선수들이 유럽으로 진출해 유럽 축구를 직접 겪고 느껴봐야 한다. 공격이나 미드필더 선수들과 달리 유럽에서 활약하는 수비수가 단 한 명도 없다. 젊은 선수들이 많이 고민해봐야 할 부분이다.
―한국대표팀이 남아공월드컵에서 얻은 수확은 무엇인가.
▲한국대표팀의 경기력이 세계 강팀들과 비교했을 때 그리 큰 격차를 나타내지 않는다는 걸 보여줬다고 본다. 그런데 우루과이전은 두고두고 회한으로 남을 것 같다. 한국이 16강을 넘어 8강에도 오를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그 기회를 잡지 못한 부분이 쉽게 잊히지 않을지도 모른다.
―주장을 맡고나서 어떤 점이 가장 힘들었나.
▲주장이 아니었을 때에는 내 몸 관리만 잘하고 경기장에서 내가 보여줄 것만 보여주면 됐지만 주장은 선수들이 경기장에서 모두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도록 말하고 행동하는 부분을 많이 신경 써야 했다. 지난 번 장난삼아 (박)주영이가 제일 말을 안 듣는다고 말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어린 후배들은 모두 내 말을 잘 받아들이고 행동으로 옮겼다. 나도 주장을 하면서 남일이 형이나 운재 형, 홍명보 감독을 많이 떠올렸다. 선배 주장들이 얼마나 진한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 싸워왔는지를 깨닫게 해준 월드컵이었다.
―한국 돌아가서 가장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그냥 아무 것도 안 하고 푹 쉬고 싶다.
절친 에브라와 통화했느냐는 질문에는 프랑스가 16강 진출에 탈락한 이후로는 전화해보지 않았다며 오랜만에 환한 웃음을 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