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촌 장관의 ‘선물’
값싼 스테이크와 치킨 요리에 속이 느글거리던 시기에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남아공월드컵을 관전하기 위해 온 유인촌 문광부 장관이 취재하느라 고생하는 한국 기자들을 위해 컵라면과 김치를 준비해왔다는 게 아닌가. 대표팀 취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던 버스 안에서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기자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이미 숙소에 도착해 있다는 컵라면과 김치를 맛볼 수 있다는 생각에 잔뜩 들뜬 상태로 버스에서 내렸다. 그런데 호텔 로비로 들어가보니 이게 웬일! 기자단 간사가 외치는 말이, “기자 한 명당 컵라면 한 개씩이에요. 모자랄 수도 있으니까 꼭 한 개만 가져가야 해요!”
유인촌 장관이 준비했다는 컵라면은 정말 기자 한 명당 한 개만 가져갈 수 있는 개수였고 남아공에서 처음 맛보는 김치는 국적, 양념, 고춧가루 불명의 이상한 맛을 내는 김치 아닌 김치였다. 한국의 장관이 기자들에게 선물한 컵라면 한 개와 최악의 김치. 로비에서 컵라면 한 개를 받아들 기자들은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당황해 할 수밖에 없었다.
정준호 김흥국 코털 깎기
2022월드컵 유치위 홍보대사 자격으로 남아공을 방문한 정준호와 김흥국이 요하네스버그에서 기자들과 만났다. 유치위에서 주최한 만찬장에 나타난 그들은 특유의 친화력으로 기자들과 폭탄주를 마시며 흥겨운 분위기를 이끌어냈다. 더욱이 그리스전에서 짜릿한 첫 승을 거둔 이후라 만찬장 분위기는 더욱 뜨거웠고 김흥국은 테이블을 돌며 ‘들이대!’를 외친 후 거푸 원샷을 했다.
만찬장에서 보여준 정준호의 주량은 만만치 않았다. 20여 차례 폭탄주 원샷을 하다가 기자가 있는 테이블로 온 정준호! 기자한테까지 ‘러브샷’을 제안한 그는 너무나 말짱한 얼굴이었지만 유치위 홍보대사로서 인사말을 전하려 하는 순간 그의 혀는 이미 꼬일 대로 꼬인 상태였다. “끅 기자님들! 끅 고생 많이 하 끅 시네요. 오늘 기분 완전 좋아부러. 정말 끅 한국대표팀이 끅 16강 가면 김흥국 씨 끅 코털 끅 깎는 거 꼭 보자구요!” 16강 진출이 확정되면 김흥국이 코털을 깎도록 하겠다고 정준호가 내건 약속은 나이지리아전 이후 한국에서 실제 상황으로 벌어졌고 김흥국은 지금 다시 코털을 기르는 중이다.
▲ “팍 왔나요?” 남아공 팬들이 기자단 버스를 대표팀 버스인 줄 알고 환호하고 있다. |
포트엘리자베스에서 열린 그리스와의 첫 경기를 앞두고 대표팀 선수들이 훈련하는 겔반데일 스타디움을 찾았을 때의 일이다. 기자들이 탄 버스가 경기장 입구에 도착하니까 100 여 명의 흑인 어린아이들이 버스를 보고 부부젤라를 불어대며 뛰어오는 게 아닌가. 그들은 기자단 버스가 대표팀 버스인 줄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기자들이 내릴 때마다 박수를 치며 더 크게 부부젤라를 불었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은 선수들치곤 옷차림도 그렇고 나이가 꽤 들어보이는 아저씨들이 많다고 생각했던지 그중 한 아이가 이렇게 물었다. “당신들은 누구냐? 한국 선수들은 언제 오느냐?” 그러면서 “팍은 왔느냐? 팍은 어디에 있느냐?”
나중에 아이들은 대표팀 버스에서 내리는 박지성을 직접 봤지만 정작 박지성을 보고도 그가 누군지를 몰랐다. 이유인즉슨, 우리가 흑인들 보면 비슷비슷하게 생겼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들한테도 동양 선수들의 얼굴은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비슷한 이미지로 비춰진 것이다. 남아공에 프리미어리그 경기가 방송되는 까닭에 흑인 아이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최고의 팀 맨유에서 뛰는 박지성을 알고 있었지만 실제 한국 선수들을 보고선 모두가 ‘팍’처럼 보여 헷갈려 했다. 그러니 ‘팍’을 보고도 ‘팍’인 줄 모를 수밖에.
16강 진출 기쁨도 잠시
나이지리아전 무승부로 인해 16강 진출을 확정지은 날 밤, 기자단 숙소에선 새벽 2시까지 마라톤 회의가 열렸다. 대부분의 기자들이 한국을 떠나오기 전 나이지리아전이 끝난 다음날 귀국행 비행기를 예약한 터라 그 비행기를 취소하고 당장 (우루과이전이 열리는) 포트엘리자베스로 떠나느냐, 아니면 대표팀 베이스캠프가 있는 루스텐버그로 다시 돌아가느냐 하는 문제로 난상토론이 벌어졌던 것. 특히 조별리그 3차전 동안 경기 이틀 전에 경기장소로 이동했던 대표팀은 FIFA에 16강전에도 그 방식을 선택하고 싶다고 했지만 FIFA에서 즉시 답변을 하지 않았던 탓에 대표팀을 뒤쫓는 기자들도 대표팀 일정을 기다리며 초조한 마음을 달래야 했다. 16강전에 올라갔다는 기쁨도 잠시, 항공 일정, 숙소, 버스 등 모든 부분이 꼬여 버리자 더반의 기자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밤을 꼴딱 새우며 대표팀 언론 담당관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때 한 기자가 이렇게 소리쳤다. “야쿠부(나이지리아 공격수, 한국전에서 결정적인 역전골을 실패한 장본인) 이 개X!”
박지성 은퇴에 쏠린 관심
월드컵 내내 가장 큰 관심은 과연 박지성이 이번 월드컵을 끝으로 대표팀에서 은퇴하겠다고 발표하느냐의 여부였다. 우루과이전 전날 열린 기자회견에서도 은퇴 얘기는 다시 나왔고 박지성은 “지금은 은퇴 얘기를 거론할 시기가 아니다”라며 정확한 답변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루과이전이 끝나고 믹스트존에서 만난 박지성에게 기자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박지성 선수의 은퇴 여부에 대해 관심이 뜨겁다. 속 시원한 입장을 듣고 싶다”라고. 그때 박지성은 “이번 월드컵을 준비하면서 마지막 월드컵이란 생각을 했었다”면서 “그러나 대표팀 은퇴 여부는 좀 더 생각해 봐야겠다”라고 대답했다.
박지성이 말한 은퇴 시기는 아마도 내년 1월 아시안컵 이후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 올림픽, 월드컵을 모두 경험한 박지성은 아시안컵 대표로 뛴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 아시안컵 출전을 마지막으로 대표팀에서 물러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박지성 아버지 박성종 씨는 “며칠 전 지성이랑 대표팀 문제에 대해 얘길 나눴다”면서 “내가 보기엔 대표팀을 위해 지성이도 할 만큼 했다. 특히 이번 월드컵에선 지금까지 축구를 시작한 이래 가장 열심히 뛰었고 가장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숙제’를 마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표팀은 아시안컵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