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제공=삼성라이온즈 |
―언제 은퇴를 결정했는가.
▲전반기 마지막 게임이 광주 일정(7월 20일~22일)이었다. 광주에 가기 전에 구단과 상의하면서 일단 은퇴 의사를 확실하게 밝혔다. 나야 은퇴 선언을 하면 그만이지만, 구단은 절차를 밟아야하기 때문에 최종 결정은 광주에 가서 이뤄졌다.
―18시즌을 뛰었다. 기회만 계속 주어지면 평균 이상의 좋은 성적을 낼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갑작스럽게 은퇴 결정을 했다. 결정이 힘들지 않았나.
▲당연히 힘들었다. 솔직히 2~3년 더 뛸 수도 있겠지만 사람이란 때가 있다. 벤치를 지키는 시간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기 위해선, 나와 팀을 위해 빨리 결정을 내리는 게 여러모로 좋을 것 같았다. 미국이나 일본 사례를 보면 나보다 더 많은 나이에도 현역으로 뛴 사례가 분명 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마흔두 살까지 뛴 것 자체가 운이 따랐기 때문일 것이다.
―팬들이 많이 아쉬워하고 있다. 특히 충성도 높은 팬들이 많은데.
▲난 팀의 일원이다. 팬들에겐 내가 팀의 중요한 자산일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팀이 우선이다. 구단에서 배려를 많이 해줬다. 은퇴경기를 치를 수 있게 됐다. 포스트시즌 엔트리에도 들어갈 수 있도록 기회를 준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배려가 있었는가.
▲전적으로 내 의사를 존중하겠다고 했다. 팀은 내가 내년에도 선수로서 연봉계약을 하고 싶다면 그리 해주겠다고 했다. 또 다른 팀에 가서 뛰고 싶으면 풀어주겠다는 얘기도 나왔으니 모든 걸 나에게 맞춰주겠다는 얘기였다. 너무 감사한 마음이다. 사실 다른 팀에 가는 것도 생각을 전혀 안 해본 건 아니다. 하지만 구단에서 너무 잘해주고, 또 여기서 선수생활을 마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때가 있다. 사실 내가 엔트리 한자리를 까먹고 있었다. 후배들에게 기회를 주는 게 옳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섭섭한 것도 있지만 더 크게 생각해보려 했다. 또 팀 성적 좋을 때 그만둬야 하지 않겠나.
양준혁은 7월 24일 대구구장에서 열린 올스타전에 대체선수로 출전했다. 양준혁은 올스타전에서 3점 홈런을 쏘아 올리며 홈팬들의 열광적인 박수를 받았다. 알고 보니, 이날 올스타전은 양준혁에겐 일종의 고별무대였던 셈이다.
현실적으로 양준혁이 은퇴하면, 젊은 타자들 2~3명이 출전 기회가 늘어나는 혜택을 얻는다. 경기에는 잘 나가지 못하면서 엔트리 한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게 싫었다는 건, 결국 후배들에 대한 미안함을 의미한다. 또한 팀 성적이 좋은 상태에서 은퇴 발표를 해야 본인도 마음이 가볍다. 결과적으로 양준혁이 은퇴 발표를 하기에 아주 좋은 타이밍이었던 셈이다.
▲ 프로야구 올스타전이 지난 24일 대구시민야구장에서 열렸다. 이스턴리그 양준혁이 7회말 스리런홈런을 치고 홈에 들어 오며 두산의 손시헌과 하이파이브 하고 있다. |
▲통산 최다홈런(351개)과 최다안타(2318개)다. 경기는 이번 올스타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SK 김성근 감독님이 대구 팬들을 위해 나를 대체선수로 뽑아주셨다. 너무 뜻 깊은 경기였다. 팬들에게 인사하는 마지막 기회였고, 또 홈런도 치면서 좋은 모습으로 끝날 수 있었다.
―‘이젠 은퇴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경기가 따로 있는가.
▲어느 한 경기는 아니다. 아무래도 자꾸 벤치를 지키게 되니까…. 팀에 보탬이 되지 않으면 언제든지 그만두겠다는 생각을 꾸준히 했다. 그럼에도 처음 생각한 뒤 한 달 이상 시간을 끌었다. 아무래도 갑자기 손을 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니 쉽지 않았다. 고민이 왜 없었겠는가.
―선수로서 가장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가.
▲다른 무엇보다도 통산 2500안타까지는 치고 싶었는데, 그걸 못하게 돼 아쉽다.
―그간 고마웠던 사람들을 꼽아본다면.
▶김응용 사장님, 김재하 부사장님, 김성근 감독님, 그리고 내가 평소 양아버지처럼 따르는 배호영 씨란 분이 있다. 김성근 감독님 밑에서 1년간 야구를 배우면서, 야구를 더 오래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정신적으로 강해지고 혼을 심어서 야구를 하는 걸 배우게 됐다.
―김응용 전 감독과는 두 차례에 걸친 인연이 있었는데.
▲나를 두 번이나 살려주신 분이다. 98년 말에 삼성에서 해태로 트레이드됐을 때 거부했었다. 그리고 해외진출을 타진했었다. 당시 시애틀 매리너스의 짐 콜번 극동담당 스카우트가 날 데려가려 했다. 하지만 시애틀이 낼 수 있는 이적료가 40만~50만 달러로 그다지 높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이뤄질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 해태 감독이셨던 김응용 사장님이 내게 전화를 걸어오셨다. “준혁아, 딱 1년만 하자. 1년 후에는 다른 팀으로 보내줄게”라고 말씀하셨다. 달리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결국 해태로 갔는데, 정말로 1년 만 뛰고 다른 팀(LG)으로 보내주셨다.
양준혁은 2001년 말에 또 한 번 김응용 사장과 인연을 맺게 된다. 양준혁은 2001년까지 LG에서 뛴 뒤 생애 첫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었다. 그에 앞서 해태 김응용 감독은 2000년 10월 삼성 감독으로 신분이 바뀌어 있었다. FA가 됐지만, 양준혁은 엄청난 스타성과 기량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이렇다 할 러브콜을 받지 못했다. 선수협회 경력 때문이다. 선수협회 탄생 과정에서 양준혁은 몇몇 선수들과 함께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 때문에 각 구단 고위층이 양준혁 영입을 꺼렸다는 것이 정설로 전해지고 있다. 삼성 역시 처음에는 양준혁에게 다시 라이온즈 유니폼을 입히는 걸 탐탁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김응용 당시 감독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양준혁 같은 선수가 삼성에 다시 와야 팀이 발전한다”는 얘기였다. 결국 삼성은 2001년 말 양준혁과 4년짜리 FA 계약을 했다.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되지만 동행하기로 했다. 어떤 일을 하게 되나.
▲그야 물론 배팅볼 투수다. 올해 들어와서 이미 여러 차례 하고 있었는데, 상대편에서 왼손투수가 나오는 날 내가 우리 타자들에게 프리배팅 공을 던져줄 것이다. 내가 후배들을 어릴 때부터 계속 봐왔기 때문에 장단점을 잘 안다. 나는 코치분들처럼 직접 가르치는 게 아니라 선수들 곁에서 조언자 역할을 하게 될 것 같다.
―시즌 후 계획은 무엇인가. 연수 얘기도 있고 코치 기용 가능성도 언급되고 있다.
▲코치는 아직 잘 모르겠고, 해외리그 연수를 한 번 가는 게 맞는 것 같다. 연수를 다녀온 뒤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구체적으로 모르겠다. 연수가 됐든 뭐가 됐든 시즌 종료 후에 차분하게 생각해야 할 것 같다.
―마지막 질문이다. 양준혁에게 삼성 라이온즈란 어떤 존재인가. ‘파란 피’ 얘기는 지금도 자주 언급되는데.
▲삼시세끼 밥 같은 거 아닐까. 너무나 자연스러운 거. 아니, 그보다도 야구선수인 나에게 삼성은 가장 오래된 연인이다. 선수 생활 중간에 잠시 다른 팀에도 있었지만, 역시 삼성은 내게 둥지 같은 곳이다. 오래된 연인의 품에서 은퇴할 수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김남형 스포츠조선 기자
내도 시켜주면 수비 잘한데이!
야구장에선 늘 위풍당당했던 양준혁이지만, 그에게도 콤플렉스는 있다.
우선 술을 잘 못 마신다. 기자가 양준혁과 처음 알게 된 건 지난 2001년이었다. 그 후 햇수로 10년 동안 몇 차례 술자리를 함께한 적이 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술자리라기보다는 늦은 저녁식사를 하면서 약간의 술을 곁들였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처음 식사를 하게 됐을 때, 솔직히 긴장한 마음으로 그 자리에 나갔다. 양준혁이 어디 보통 체격인가. 다른 기초 종목에 비해 운동량이 많지는 않지만, 야구선수는 거의 매일 꾸준하게 훈련을 반복한다. 때문에 야구선수들은 말술인 경우가 많다. 양준혁 역시 술을 잘 마실 것처럼 보였다.
아니었다. 잠시 후 양준혁은 맥주 세잔 정도에 얼굴이 벌겋게, 아니 검붉게 변했다. 예상과는 딴판이었다. 그 후에도 양준혁과의 식사 자리에선 늘 그 정도의 술로 끝이었다. 물론 운동선수인 만큼, 양준혁도 하루 날을 잡아 작정하고 마시면 만만치 않은 주량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상황 자체를 양준혁이 즐기지 않는다. 가끔 술자리가 있을 때면, 많이 마시지 않으면서도 그 자리를 즐기는 게 양준혁의 특기다. 어쩌면, 이런 모습 덕분에 선수로서 롱런이 가능했을 것이다.
두 번째 콤플렉스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항목이다. 마흔 살이 넘도록 결혼을 하지 못했으니, 그는 연말 골든글러브 시상식장에서 아나운서와 게스트 연예인들로부터 놀림받는 단골손님이었다. 양준혁의 항변도 일리가 있다. 어찌어찌하다보니 때를 놓쳤는데, 그 후엔 저녁 시간이 없는 야구선수의 특성상 이성을 만날 기회가 더욱 줄어들더라는 것이다. 양준혁은 평소 “집도 있고, 살림살이도 다 장만했으니, 이제 신부만 구하면 된다”며 웃는다. 장담컨대, 수년 내에 양준혁이 결혼발표를 한다면 아마 은퇴발표 못지않은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야구 경기와 관련돼 양준혁이 다소 억울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양준혁은 수비가 안 된다’는 선입견이다. 돌이켜보면, 양준혁은 2002년 삼성으로 컴백한 뒤부터 수비수로 나서는 경기가 점차 줄어들었다. 가끔 외야수 혹은 1루수로 기용되긴 했지만, 코칭스태프의 기본 정서는 ‘양준혁의 수비를 보면 불안하다’는 것이었다. 최근 몇 년 간은 거의 지명타자로만 뛰었다.
양준혁은 “그건 조금 억울하다. 계속 수비를 맡게 되면 나도 잘할 수 있는데 기회가 너무 적으니 굉장히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측면이 있다”고 강조하곤 했다. 실제 양준혁이 외야 수비를 보면, 체구가 커서 다소 뒤뚱거리는 듯한 모습이 나타나지만 의외로 타구 판단과 수습 능력이 괜찮은 편이다.
이 같은 조건 때문에 양준혁의 각종 통산 기록은 더욱 대단해 보인다. 수비를 하지 않고 지명타자로만 뛰면서도 경기 감각을 잘 유지했기 때문이다. 대략 40분씩 멍하니 앉아있다가 한 번씩 나가서 집중력을 갖고 배트를 휘두르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