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일 K리그 포항 스틸러스와 FC 서울 경기에서 서울 최태욱이 선제골을 성공시킨 뒤 제파로프의 축하를 받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FC 서울 최효진. 연합뉴스 |
#역시 내가 갈 곳은 고향뿐…
비록 쉼 없이 이어지는 리그 스케줄과 전지훈련 등으로 인해 명절 때도 짬을 내기 대단히 어렵지만 간혹 찾아오는 기회가 있다면 바로 원정 경기다. FC서울 주축 수비수 김진규는 포항 원정이 너무도 기다려진다. 오직 자신을 위한 응원이 원정 팀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포항 스틸야드에서도 펼쳐지기 때문. 김진규의 고향은 경북 영덕. ‘영덕의 자랑 김진규’란 글귀가 적힌 대형 플래카드가 곳곳에 내걸려 마치 서울월드컵경기장을 연상케 한다.
지난 1일 포항 스틸야드에서 치러진 K리그 포항과 서울 경기 때도 7개의 걸개가 부착됐는데, 이 중 4개가 영덕 팬들이 김진규를 위해 마련한 것들이었다. 당시 김진규는 후반 14분 김한윤을 대신해 교체 투입된 데 그쳤다. 직전에 열린 수원 원정전에서 자책골을 기록해 마음고생이 심했던 탓. 그러나 김진규는 경기 후 고향 팬들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감사의 인사를 건네는 ‘센스’를 잊지 않았다.
이는 사령탑이라고 해서 다를 바 없다.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가 일품인 국가대표팀 조광래 감독의 고향은 경남 진주. 전국 곳곳에서 그를 알아보고 사인을 요청하는 사람들 때문에 저녁 한 끼 사먹기도 어렵다는 조 감독이지만 특히 진주에서는 더하다. 그야말로 영웅 대접까지 받을 정도라니 여느 연예인 부럽지 않다. 조 감독은 진주종합경기장이 건립됐을 때 시(市)의 초대를 받고, 경기장 개장 기념행사로 열린 경남-전남전을 관전했다.
한국을 사상 첫 원정 월드컵 16강에 올려놓은 뒤 인천 지휘봉을 잡은 허정무 감독도 고향 전남 진도에서 최고 영웅으로 통한다.
성남 신태용 감독도 포항 원정이 기다려진다. 김진규처럼 신 감독의 고향도 영덕. 어느덧 초짜 냄새를 지워버리며 명장 반열에 오르기 위해 차근히 단계를 밟고 있는 신 감독이 포항 원정을 오면 영덕 주민들은 스틸야드 스탠드 한쪽을 메우고 포항이 아닌, 성남을 응원하는 진기한(?) 장면을 연출하곤 한다. 성남과 포항은 오래 전부터 좋지 못한 추억 속에 팽팽한 경쟁 구도를 이뤄왔다.
산란을 위해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들처럼 고향을 찾아 떠나는 경우도 있다. 전북에서 뛰던 대표 출신 미드필더 정경호와 서울에서 뛴 이을용은 나란히 고향 팀 강원에 합류해 성공적인 현역 축구인생 제2막을 힘차게 열어젖히기도 했다.
#날 키워준 ‘제2 고향’ 찾아
진짜 고향은 아니지만 유난히 포근하게 느껴지는 곳도 있다. 역시 원정 경기 때가 대부분인데 오랜만에 친정 팀을 상대할 때가 그렇다.
포항전을 앞두고 서울의 오른쪽 측면 듀오 최효진-최태욱의 표정은 더없이 밝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둘 모두 포항을 거쳐갔기 때문. 당시 경기에서 주요 득점 루트로 맹활약한 둘은 종료 휘슬이 울린 뒤 곧장 포항 서포터스가 위치한 스탠드로 달려가 넙죽 큰절을 올리며 훈훈한 정을 과시했다. 포항 서포터스가 야유 대신 큰 환호와 갈채로 답례한 것은 물론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이 사례들처럼 ‘아름다운 이별’을 택한 것은 아니다. 대개 어떤 선수가 해외가 아닌 국내 이적을 택할 때는 선수 본인이 원했기보다는 구단 간의 이해관계 및 필요에 의해, 혹은 주전 경쟁에서 밀렸을 때 피치 못하게 이뤄지는 상황이 대부분이다.
전북에서 수비수와 공격수를 오가며 맹활약하고 있는 심우연은 자신이 몸담았던 서울을, 그것도 상암벌에서 올 초 만났을 때 결승골을 뽑은 뒤 돌연 총을 쏘는 시늉을 했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돌아온 대답이 가히 압권이었다. “‘서울에서의 난 죽었다’는 표현이었다.” 심우연의 예상치 못한 한마디에 대한 반응은 찬반 두 갈래로 극명히 엇갈렸으나 확실한 점은 밋밋하기만 했던 축구 열기를 후끈하게 되살렸다는 사실이었다.
더불어 대한민국 남자들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군대도 축구계에 소소하고도 잔잔한 이야깃거리를 선사한다. 국내 유일의 군 팀 광주 상무가 아니다. 바로 해병대 얘기다. 포항 홈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빠짐없이 모습을 드러내는 이들이 붉은 티셔츠를 입고 짧은 돌격 머리로 통일한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다. 바로 ‘귀신 잡는 해병’들이다.
사실 축구 선수가 상무가 아닌 현역으로 입대하는 것은 대단히 놀라운 사례다. 그것도 상무 입대 테스트 탈락이 아닌 자원입대라면 놀라움은 더욱 커진다. 그러나 현역병을 다녀온 뒤 성공한 사례도 프로축구에는 꽤 많다. 부천SK(현 제주)의 명 골키퍼로 명성을 떨친 이용발이 그랬다. 요즘 K리그 핫이슈의 주인공은 포항 중앙 수비수 김원일이다. 그는 축구화를 완전히 벗을 요량으로 해병대에 자원입대해 2년 군 복무를 마쳤으나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다.
번외지명으로 포항에 입단한 김원일은 대표 출신 황재원이 수원으로 이적한 틈을 타 주전 자리를 꿰차는 놀라운 성장세를 보였다. 김원일은 항상 연례행사처럼 포항 홈경기 때마다 꼭 하는 일이 있다. 해병 응원단 앞으로 다가가 전우들에 대한 거수경례를 하는 것. 해병대의 열렬한 환호가 쏟아지는 건 당연하다. 포항 구단으로선 전혀 생각지 못했던 한 가지 ‘마케팅 아이템’을 거저 얻은 셈이다.
남장현 스포츠동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