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아카데미 시상식, 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가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할 때 시상대에 오른 사람은 바로 소피아 로렌이었다. 이때 베니니의 수상 소감은 아마도 결코 농담이 아닐 것이다. “지금 제가 가지고 싶은 건 오스카 트로피가 아니라 소피아 로렌이에요.”
1934년 9월 20일, 그녀는 자선 단체의 병실에서 미혼모의 딸로 태어난다. 어머니인 로밀다 빌로니는 단역 배우. 아버지는 건축기사였으나 가정이 있는 상태에서 불륜을 저질렀다. 그는 소피아의 가정을 전혀 돌보지 않았고 소피아는 어머니와 함께 나폴리 근처 어촌인 포추올리의 빈민가에서 자랐다.
가난한 소피아에게 가장 큰 재산은 미모였다. 소피아는 어린 시절엔 ‘이쑤시개’라는 별명이 따라다닐 정도로 말랐지만 14세가 되면서 몸에 과격한 굴곡이 생기기 시작했고 ‘바다의 여왕 선발대회’에 나가 입상한다.
길거리에서 빵을 구걸하고 군수공장에서 일하던 소피아는 그 상금으로 어머니와 함께 로마행 기차표를 산다. 1950년 ‘미스 이탈리아 선발대회’에서 2등을 차지한 그녀를 눈여겨 본 사람은 바로 이탈리아의 저명한 영화제작자 카를로 폰티였다. 폰티는 그녀를 배우로 데뷔시켰고 <아이다>(1953)의 주인공으로 발탁한다.
22세의 나이 차이에다 폰티에겐 이미 가정이 있었지만, 그들은 연인이 된다. 폰티는 로렌을 할리우드로 진출시켰고 첫 영화는 캐리 그랜트와 공연하는 <자존심과 열정>(1957)이었다. 31세 연상이었던 그랜트는 로렌에게 구혼했고 로렌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 폰티는 그녀를 데리고 멕시코로 가 결혼식을 올렸다.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성장한 로렌에겐 나이 많은 남성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무려 서른네 살이나 많았던 클라크 게이블이나 스무 살 위인 타이론 파워 그리고 열여덟 살 차이의 그레고리 펙 등에 대해 그녀는 자신의 이상형이라고 서슴없이 말하곤 했다.
섹시 스타로서 소피아 로렌의 이름을 전세계적으로 알린 작품은 <돌고래 소년>(1957)이었다. 이 영화에서 해녀로 등장하는 그녀는 물에 젖은 채 174센티미터에 38-24-38이라는 4차원적 각선미를 드러낸다. 1961년엔 <두 여인>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배우로서의 입지를 더욱 다졌다. 1957년에 결혼식을 올렸지만 1966년에 로렌과 폰티는 정식 부부가 된다. 이탈리아 국적을 포기하고 프랑스 법정에서 이혼을 인정받아 중혼죄가 기각된 것. 그들은 두 아이의 부모가 되었고 2007년 폰티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50년을 함께했다.
소피아 로렌의 위대함은 섹시 이미지로 부각되었지만 다양한 장르를 시도해 중년 이후에도 배우로서 그 매력을 잃지 않았다는 점이다. 엄마나 할머니 역에 만족할 환갑의 나이에 출연한 <그럼피어 올드맨>(1995)에서 그녀는 섹시한 이혼녀로 등장하고 <패션쇼>(1994)의 속옷 신에선 도저히 60세 여성의 몸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탱탱함을 보여준다. 참고로 그녀는 50세까지 24인치의 허리 사이즈를 유지했다. 더욱 놀라운 건 2007년 73세의 나이로 고품격 누드의 전설인 피렐리 캘린더의 모델이 되었다는 것. 누드를 찍진 않았지만 30대라고 해도 믿을 만큼 젊고 매력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시대를 풍미했던 섹시 아이콘이었지만 소피아 로렌은 ‘드러내지 않는 관능미’의 지지자였다. <원초적 본능> 이후 샤론 스톤이 한참 부상할 땐 “스톤은 섹스를 마치 스파게티나 피자처럼 아무렇지 않게 드러낸다. 섹스는 사적인 것이며 좀 더 신중하게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드레스 안에 감춰진 그녀의 아름다움이 가끔씩 드러나는 순간 우린 ‘연륜의 에로티시즘’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