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6일 KBL 사무실에서 만난 장준혁, 황순팔, 신동재 심판(왼쪽부터). 그들끼린 농구에 ‘미친’ 놈들로 통한단다.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치열한 순위 다툼으로 뜨겁게 달궈진 KBL코트 위, 감독 못지않은 긴장감을 안고 4쿼터를 뛰는 6번째 선수들이 있다. 정갈한 코트 질서와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선사하기 위해 무대에 오른 KBL 심판들. 그러나 ‘잘하면 본전, 못하면 뭇매’다. 박빙의 승부에선 어떤 판정을 내려도 비난 공세에 시달리기 때문. <일요신문>은 코트 위의 ‘포청천’, 황순팔 장준혁 신동재 심판을 만나 그들이 가진 애환에 귀 기울여 봤다. 가슴 속, 농구를 향한 뜨거운 애정을 담고 묵묵히 코트 위를 누비는 KBL 숨은 공신, 심판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자.
“좋아한단 말론 부족해요. 저희끼린 농구에 ‘미친’ 놈들로 통합니다.” 이들 3인방이 심판의 길로 들어선 사연에도 ‘농구사랑’이란 공통분모가 존재했다.
신동재 심판은 “작은 실수 하나가 내 운명을 결정지었다”며 입을 열었다. 선수 은퇴 이후 나산 플라망스 구단 주무를 맡고 있던 그는 정확한 룰을 배워야겠단 생각에서 심판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객원 심판으로 나간 경기에서 그만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맥도웰 선수가 돌진하는 순간, 오펜스 파울을 디펜스 파울로 잘못 판정하고 만 것. 이후 ‘그 순간의 실수를 평생 만회하며 정확한 판정으로 농구에 이바지하자’는 결심을 했다고.
또래보다 키가 작은 편이던 황순팔 심판은 농구 선수란 어릴 적 꿈을 포기하는 대신, 코트 위에 설 수 있는 다른 일을 찾다가 이 길로 들어서게 됐다. 그는 “농구에 대한 애정을 코트 위에서 마음껏 내뿜을 수 있는 매력 있는 직업”이라며 미소를 보인다.
장준혁 심판은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린다. “학교 대항 농구 시합에 나가 아깝게 패한 적이 있다. ‘심판 때문에 졌다’는 생각이 들어 농구 규칙을 파고들다 보니 나도 모르는 새 심판이란 직업을 사랑하게 됐다. 군대에 있을 때 심판 강습 때문에 청원 휴가를 낼 정도였다.”
부푼 꿈을 안고 시작한 심판의 길. 그러나 판정의 세계엔 고독과 외로움이 있을 뿐이었다. 심판이 되자 코트 위에서 동고동락했던 선후배들도 하나 둘씩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함께 선수로 뛰던 동료들도 판정에 시비를 걸며 비난을 했다.
신동재 심판은 “동문회는 물론이고 농구 쪽에 몸담고 있는 지인들을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됐다”며 씁쓸한 마음을 내비쳤다.
▲ 사소한 판정 실수가 팀 승패를 좌우하기도 한다. 유도훈 감독에게 판정을 설명하고 있는 장준혁 심판. 사진제공=인천 전자랜드 |
코트 밖에선 손가락질과 욕설이 난무했다. 3년 연속 심판상에 빛나는 ‘명판관’ 장준혁 심판에게도 잊을 수 없는 오심의 순간이 있었다. 지난 2003~2004 시즌 플레이오프 경기 도중 내린 판정 때문에 두 시즌 자격 정지란 중징계를 받았던 것. 각도에 따라 판단이 달라질 수 있는 애매한 순간이었지만 오심의 대가는 컸다. ‘차라리 내가 심판하겠다’ ‘그따위로 할 거면 그만둬라’ 등 팬들의 질타가 이어졌다. 장준혁 심판은 “나보다 가족이 입은 상처 때문에 마음이 아팠다”며 입술을 깨문다.
감독만 연구하고 선수만 훈련한다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KBL 심판들은 ‘연구와 훈련’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아야 한다. 출근은 10시. 2시간 동안 비디오 분석을 한 뒤 시청각 교육을 받는다. 식사 후엔 체육관에 모여 2시간 동안 체력 강화 훈련에 돌입한다. 이후 개인 운동을 마친 심판들은 서울에서 경기가 있는 날엔 직접 참관하고 그렇지 않은 날엔 자택에서 꼼꼼하게 시합을 모니터한다.
비시즌엔 강원도에서 더욱 혹독한 훈련이 개시된다. ‘선수 못지않은 체력을 가져야 한다’는 박광호 심판위원장의 방침에 따라 오전엔 모래사장을, 오후엔 미시령 고개를 달린다. 신동재 심판은 “체중이 14㎏이나 빠져 선수 시절의 몸매로 돌아왔다. 1등에겐 박 위원장이 백화점 상품권을 선사한다. 심판들이 더 죽어라 달리는 이유이기도 하다”며 웃음을 보인다.
코트 위를 누비는 심판들이기에 이들만큼 선수들에 대해 잘 아는 사람도 없을 것. 심판 생활을 하면서 가장 대단하다고 느낀 선수를 꼽아달라는 질문을 하자 서장훈, 신기성, 추승균 등 노장 선수들을 거론한다. 세 명의 심판들은 “예전엔 30살이 넘으면 은퇴 수순을 밟곤 했는데 요즘은 30대 중반의 선수들도 대활약을 펼치는 것을 보면서 대단하단 생각을 했다”고 입을 모은다. 구단마다 분위기도 다르단다. 장준혁 심판은 “삼성 썬더스가 가장 자유로운 것 같다. 코트 위에서도 자유로운 분위기가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이번 시즌 KBL 판도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3인방은 “우리가 뭘 알겠느냐”며 대답을 아끼다가 “지금 순위를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좀 더 지켜봐야한다”고 어렵게 입을 뗀다.
코트 위에 선 선수들이 더욱 빛나도록 그림자를 자청한 KBL의 ‘숨은 공신’ 심판들. 코트 위 긴장과 스트레스 속에서 흘리는 이들의 구슬땀은 농구를 향한 사랑으로 승화되고 있었다.
정유진 기자 kkyy1225@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