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생 개띠 홍 9단은, 지금은 여느 원로기사들처럼 조용히 잊히고 있지만 일찍이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는 매체에 자주 등장하던 기사였다. 성적도 성적이지만, 성적보다는 경기고-서울법대 출신이라는, 요즘말로 우선 그 화려한 스펙이 화제에 오르곤 했다. 요즘도 대학 출신 프로기사 숫자는 절대 열세인데 하물며 당시임에랴. 저런 엘리트가 프로기사를 택하다니. 덕분에 바둑의 위상이 한 단계 높아졌다. 일본에선 지난번에 한번 소개했듯 일본기원 소속 이시쿠라 노보루(石倉 昇·57) 9단이 홍종현과 비견되는데, 아무튼 이쪽 계보에서는 홍 9단이 선배인 것.
게다가 홍 9단은 진기한 타이틀 보유자였다. 입단대회를 두 번 통과한 것. 1964년에 입단대회를 통과한 후, 두 달 만에 사표를 던졌다. 판검사에 대한 미련을 떨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1969년 다시 입단의 관문을 지나, 법복 대신 벗었던 프로기사의 옷을 입었다. “막상 판검사가 된다한들 그게 무슨 그리 큰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그것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바둑을 두며 사는 게 더 행복할 것 같았다”는 것이었는데, 어쨌든 그래서 홍종현은 가야금의 황병기, 대중가요 가수 최희준과 함께 당시 서울법대 출신 이단아 3인방의 한 사람이 되었다. 소설가 최인훈 조성기도 서울법대지만 법과 문학은 사람들이 그렇게 먼 거리로 여기지 않았던 모양이다.
젊었을 적에는 독특한 기풍에 성적도 좋았다. “한 수에 한 집을 지으면 성공”이라는 어록을 남긴 철저한 실리파로 집에 아주 짜다 해서 ‘홍 소금’, 계가 바둑에 능하다 해서 ‘반집의 수학자’라는 별명이 있었다. 1971년에 청소년배에서 우승했고 1977년에는 제21기 국수전의 도전자가 되어 당시 욱일승천하던 조훈현과 5번기를 겨루었다. 조훈현을 이기지는 못했지만, 그 시절 조훈현과 타이틀 매치를 벌인 몇 사람 안 되는 기사 중 하나였다.
남양 홍씨 종손임을 자부하던 홍종현은 평소에는 유학자의 풍모였다. 문어체의 말투에 느릿한 팔자걸음이었고 한문에 밝았으며 말술의 풍류를 즐겼다. 술자리에서는 명심보감, 소학의 구절을 줄줄이 읊었고 삼국지의 장면들을 재연했다. 그 뛰어난 입담에 별명이 하나 더 붙었다. 홍구라. 평생을 민주민족운동에 몸 바친 백기완 선생이 백구라, 소설가 황석영이 황구라인 것처럼, 바둑계의 홍종현은 홍구라였다. 줄기찬 음주 흡연으로 건강에 신호가 오자 달력에 술 마신 날은 동그라미를 치며 절주하면서 중년의 어느 날부터인가는 여행에 취미를 붙여 남들이 많이 가는 곳은 물론 잘 가지 않는 곳들을 찾아다녔다. 인도를 갔다 왔고 회색 하늘과 기차 굴뚝이 뿜어내는 뭉게구름 같은 흰 연기와 기차와 철로와 눈 덮인 평원이 평행선으로 달리는 <닥터 지바고>의 한 장면처럼, 보름 동안 기차를 타고 시베리아를 횡단했다. 그리고 가끔 이렇게 말했다.
“내 친구 녀석들 관계로 나간 놈은 지금쯤 잘해야 중앙부처 국장 정도고, 고시 패스한 놈들은 지검장이나 지청장인데, 아니, 걔들보다야 내가 낫지. 걔네들 골치 아파요. 불쌍해. 난? 재미있잖아요. 자유롭잖아요. 눈치 볼 놈 없고, 내 맘대로잖아. 가고 싶으면 가고, 자고 싶으면 자고… 하하하.”
앞으로는 홍구라의 구라를 듣기 어렵게 되었다. 해가 바뀌었으니 65세. 은퇴가 신선하다. 프로기사는 굳이 은퇴랄 게 없는 평생직업이다. 그러나 누가 밀어내는 것도 아닌데 스스로 물러날 때를 골라 물러나는 모습은 산뜻하다. 프로기사는 자유업이고, 창작의 요소도 크지만, 창작보다는 승부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가 예전에 후진양성에 힘을 쏟았을 때가 있었는데, 도장 이름이 ‘신독헌(愼獨軒)’이었다. ‘신독’은 ‘대학’에도 나오고 ‘중용’에도 나오는 말로 혼자 있을 때 더욱 삼간다는 뜻이란다. 신독헌의 사부답게 이제 신독의 경지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인지.
그가 길러낸 제자도 김영환 김승준 이상훈(이세돌 형이 아닌 큰 이상훈) 윤현석 윤성현 김성룡 양건 9단, 이상훈 7단, 공병주 4단 등 상당한데, 김성룡 9단이 ‘김구라’라는 별명을 이어받고 있다. ‘반집의 수학자’라는 별명은 제자가 아닌 안조영 9단이 물려받았다.
작년에는 봄에 윤기현 9단이 순간의 판단 착오와 미망으로 육십 평생의 공든 탑을 스스로 허물고 쫓기듯 나가고 가을에는 합천도사 하찬석 9단이 예순하나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다더니 올해는 해가 밝자마자 홍종현 9단이 바둑 동네 문을 열고 나간다. 하나 둘 떠나면 누가 남나. 1943년생 김인 국수 혼자 너무 외로워 보인다.
이광구 바둑평론가
신묘년 새해, 바둑계에선 또 어떤 새로운 얼굴이 나타나 우리를 즐겁게 해 줄 것인지. 토끼띠 기사 중에 누구 도약할 사람은 없을까. 토끼띠는 재주가 많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프로기사 중 토끼띠를 찾아본다.
우선 이창호 최명훈 윤성현 9단과 이세돌 9단의 형 이상훈 7단이 1975년생 토끼띠. 우리 바둑계 중추 역할을 하고 있는 그룹이다. 1990년에 새로 시작된 여류입단대회를 통과, 신세대 1호 여자프로 기록을 세운 남치형 초단이 이들과 동갑이다. 남 초단의 입단 동기 이영신 8단은 1977년생. 해외 보급의 꿈을 안고 지난해 늦은 봄 김성래 8단, 고주연 8단과 함께 헝가리로 날아갔다. 이들은 원래 8단은 아니었으나 한국기원이 해외보급의 효과를 위해 8단으로 올려 준 것.
남초단은 입단 후 학업으로 다시 돌아가 서울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명지대 바둑학과 교수로 바둑사를 강의하고 있다. 영어 일본어에 능한 것이 바둑사 연구에 큰 무기가 되고 있다. 일본에선 관서기원 소속의 재일동포 김병민 7단, 중국은 류징 8단이 75년생 토끼띠다.
최고참 토끼띠는 39년생 고재희 8단과 김학수 5단. 초창기 한국 기단을 이끌던 맹장들인데, 어느덧 고희를 넘어섰다. 51년생 토끼띠는 KBS 바둑왕전을 26년째 해설하고 있는 노영하 9단과 프로기사보다 프로갬블러로 세계적 명성을 누리고 있는 차민수 4단이 있다. 일본 토끼띠 기사로는 저 황홀한 추억의 우주류 다케미야 마사키 9단이 있다. 우주선과 토끼, 많이 보았던 그림이다.
63년생 토끼띠는 현재 한국기원의 핵심 멤버들이다. 바둑 동네 사람들은 ‘실세’라고 부른다. 2009년 기사회장에 취임해 입단대회 개선안을 이끌어내는 등 동분서주하고 있는 최규병 9단, 아시안게임의 명감독 양재호 9단이다. 헝가리 사범 김성래 8단과 권갑용 8단의 처남인 박승문 6단이 이들과 갑장이며 일본기원 소속으로 활동하고 있는 서양인 최고단 마이클 레드먼드 9단도 63년생이다. 87년생 토끼들은 영파워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이영구 홍성지 윤준상 8단, 고근태 7단, 서건우 5단, 손근기 배준희 4단, 여자기사 김수진 3단, 최병환 2단 등 숫자도 많다. 1999년생 토끼띠 프로는 아직 없다. 그러나 앞으로 15세 이하 영재입단대회가 열린다고 하니 거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