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G배 세계기왕전 본선 2회전서 일본 이야마 9단을 꺾고 8강에 오른 이창호 9단. 이창호 9단은 전성기 시절을 연상케하는 품격 바둑의 진수를 보여주며 바둑팬들을 설레게 했다. |
이야마 9단은 바로 얼마 전 ‘한-중-일 최고수 초청전’에서 이세돌 9단과 구리 9단을 연파해 집중 조명을 받았던 일본 바둑의 희망. 이번 LG배에서도 주목의 대상이었다. 6월 13일 본선 1회전(32강전)에서 윤준상 8단을 꺾었을 때, 예전 같았으면 격려의 웃음을 보냈을 사람들이 별로 반응이 없었다. 이세돌에게도 이기고, 구리에게도 이겨 보았으니 이제 탄력을 받아 우승권에 들어가지 않겠느냐고 거꾸로 기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야마는 다음 상대로 이창호 9단을 만났다. 역시 예전 같았으면 누리꾼들의 베팅은 이창호 9, 이야마 1쯤 되었을 터이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이창호는 요즘 이세돌이나 구리보다 낫다고 말하기 어렵고, 한국에서도 랭킹이 10위권 이쪽저쪽인데, 이야마는 뭔가 한 꺼풀 벗은 모습으로 상승세를 타고 있으니까.
그러나 바둑이 진행되면서 프로-아마 고수들과 바둑 평자들의 입에서 계속 탄성이 터졌다. 이야~ 이창호 9단 멋지네. 죽죽 밀어가는구만. 이거 완전히 이창호 9단 전성기 때 모습이네. 어느덧 원로 소리를 들어도 이상하지 않게 된 중견 유건재 8단의 촌평이 그 중에서도 압권이었다.
“부처님 손바닥이네!”
이창호 9단의 오리지널 별명이 돌부처인데. 그러면서 덧붙였다.
“인심이란 게 원래 조석변이거든…^^. 불과 얼마 전에는 이야마 9단 대단하다고 갈채를 보냈는데, 이야마 9단에게는 좀 미안한 소리지만, 우리끼리 하는 얘기로 이야마 9단이 열심히 뭔가 하려는 것 같은데, 잘 안 되네. 그것 참.”
그랬다. 이창호 9단은 확실히 품격의 바둑을 보여 주었다. 이야마 9단도 눈에 띄는 실수는 별로 없었다. 그저 약간 이상하네, 그런 정도의 의문수가 두 번쯤 나왔을 뿐이다. 그러나 속절없이 밀렸고, 이창호 9단의 102수를 보고 돌을 거두었다. 승패를 떠나, 전후 사정이야 어쨌든 일본 바둑다운 싹싹함이었다. 그래서 슬픈 단명국이었지만, 이야마 9단은 졌어도 박수를 받았다.
<1도>는 초반에서 중반으로 넘어가는 상황. 이창호 9단이 백이다. 하변에 패 모양이 생겼다. 상변 흑1은 팻감이면서 동시에 백진을 제한하고 우변 흑세를 확장하는 디딤돌 같은 수. 백2로 받게 한 후 3으로 패를 따냈다. 그러자 이창호 9단은 패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4로 뛰었다. 이 공방이 이야마 9단의 첫 번째 실수였다고 지적된 대목이다.
하변 패는 어차피 백이 이기기는 어려운 곳. 따라서 흑도 패에 연연하지 말고, 흑3으로는….
<2도> 흑3처럼 여기를 마저 눌러야 했다는 것. 이렇게 눌러 놓은 것과 <1도> 백4로 뛰어나온 것과의 차이, 쌍방 세력의 확장-축소의 분기점이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3도> 흑1로 부풀렸다. 한 박자 늦었지만, 여전히 요소다. 여기서 이창호 9단이 묘한 응수타진으로 이야마 9단의 신경을 긁었고, 이야마 9단에게서 다시 실착이 튀어나온다.
<4도> 백1, 프로들이 참 좋아하는 수. 지금은 백A의 후속 수단도 보고 있다. 흑2는 백A를 선수로 방비하겠다는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바로 이게 때 이른 흑의 패착으로 지적되었다.
백3, 보폭이 좁고 느린 마늘모인데, 국후 ‘고졸(古拙)의 명수(名手)’라는 찬사를 받았다. 왕년에 린하이펑 9단이 전성기를 구가할 때 일문의 비기로 각광받았던 그런 느낌의 수, ‘린하이펑의 마늘모’를 연상시키는 수였다.
흑4, 여기를 백에게 밀리기는 싫다. 백5와 흑6은 쌍방 기세의 젖힘인데, 다음 백7이 작렬했다. 이단젖힘인데, 모양으로는 3단젖힘의 느낌이다. 이 기세가 이 판을 압도했다. 흑2로는, 백A를 가볍게 보고, 5쪽으로 뛰는 것이 대세를 잃지 않는 길이었다고 한다. 아무튼 계속해서….
<5도> 백1, 3으로 돌파를 시도하나 백4가 우선 아프다. 흑5, 7로 이쪽은 뚫었으나 백6, 8로 저쪽에 새로운 벽이 생기고 있다. 흑9는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백A로 끊는 수가 있으므로.
<6도> 흑1은 마지막 시도였다. 백2, 4는 상용의 대응책.
<7도> 흑1부터 <5도>와 비슷한 과정이 재연되고 있다. 한쪽은 뚫리고 있으나 중앙은 더욱 단단해지고 있다. 중앙은 집이 아니라고들 하지만, 지금은 무량대가가 생기고 있다. 흑11은 일단 시급한 삭감.
<8도> 백1을 선수하고 3으로 젖혀 끊어 버린 것이 결정타. 흑4에는 백5, 흑8에는 백9가 또 중앙 흑말에 대해 선수. 아니 중앙 백돌을 버리는 수. 묘한 선수다. 백13으로 중앙을 완성하고, 15로 들어가자 흑은 돌을 거두었다. 백15가 실전 102다.
이 한판으로 ‘왕의 귀환’ 운운하기는 이를지 모르나 모처럼 이창호 9단의 예전 모습을 다시 보는 즐거움이 컸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번거로운 일 질색하고, 남 앞에 나서거나 화제에 오르는 일 아주 싫어하는 이창호 9단이라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결혼이라는 인륜대사가 퍽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이제 그 부담에서 벗어난 것은 아닐까. 보통은 결혼과 동시에 안정을 찾는다고 하나 이창호 9단은 결혼 후 안정하는데 시간이 좀 필요했을 것이다.”
기회도 좋다. 이세돌 구리 콩지에 등 꼭대기들이 다 탈락했고 지난 번 우승자 박문요도 내려갔다. ‘왕의 귀환’을 위해 자기들끼리 정리를 해 준 셈이다. 요주의 인물로 남은 사람은 씨에허 7단. 이창호 9단과 비슷한 스타일인 데다가 한국 기사에게 강한 기사. 8강전부터는 멀리 11월에나 가서야 열린다. 시간이 충분히 남았다는 것도 괜찮다. 이창호 9단은 갈수록 점점 더 안정될 테니까.
이광구 바둑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