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16일 최근 출간한 <문재인의 운명>을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 노 전 대통령의 묘소에 헌정 하고 있다(출처=사람사는 세상) |
문재인 이사장은 참여정부 시절 조각에 대해 “최대 파격은 강금실 법무부 장관이었다. 당시 강금실 변호사를 추천한 건 나였다”고 밝혔다. 그러나 문 이사장은 법무부 장관을 염두에 두고 추천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강 변호사에 대해 자세히 묻던 노 전 대통령이 법무부 장관으로 하자고 했다는 것. 남성 전유물처럼 생각돼왔던 자리에까지 여성들을 과감하게 발탁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고 한다.
문 이사장은 “당선인(노 전 대통령)의 여성관은 진취적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어느 여성의 능력이 남성과 비슷하다면 그 여성은 훨씬 더 능력 있다는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또한 실현되지 못했지만, 노 전 대통령은 국민의 정부 마지막 환경부 장관을 했던 김명자 씨를 건설교통부 장관에 임명하려고 했다고 한다. 당시 새만금사업과 경인운하 등이 큰 사회적 갈등요인이어서 건설과 환경의 조화라는 어려운 과제를 염두에 둔 구상이었다는 것. 그러나 결국 고건 총리 내정자와의 협의과정에서 불발로 끝났다고 한다.
또한 언론에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진 김두관 행정자치부 장관 발탁은 전적으로 노 전 대통령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문 이사장은 “김두관 장관 재임기간 행자부는 부처의 업무수행평가와 혁신평가에서 1위를 할 정도로, 그는 장관직을 잘 수행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이장 출신 군수’라며 끊임없이 비아냥거리고 멸시하더니 끝내 학생시위를 이유로 국회에서 해임권고 결의를 했다”며 “자신 때문에 정국 경색이 장기화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김 장관이 스스로 사직을 청해왔고 결국 대통령이 사직을 수리했지만, 우리 사회 기득권자들의 횡포가 그와 같았다”며 아쉬워했다.
◇참여정부 공직자들의 삶
문재인 이사장은 참여정부 시절 자신이 조그만 연립주택에 사는 것도, 수행원 없이 혼자 다니는 것도 사람들은 특별한 일인 듯 여겼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생활한 것이 자신뿐만이 아니었다는 것. 한번은 이희범 당시 산자부 장관이 수행원 없이 친구와 함께 우산을 받쳐 들고 등산 온 것을 산길에서 만난 적이 있다고 한다. 정찬용 인사보좌관도 북한산 등산 중에 두 번이나 우연히 만났다고. 사람들은 이러한 참여정부의 공직자들이 과거와 다른 모습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 노무현 전 대통령은 스웨덴의 올로프 팔메 전 수상 얘기를 자주하며 부러워했다고 한다. 그는 “(올로프 팔메 전 수상은) 퇴근 후에 경호원 없이 자전거를 타고 시장에 가기도 해서 화제가 됐던 분이다. 결국 부인과 함께 경호원 없이 극장에서 영화보고 나오다 누군가가 쏜 총에 맞아 사망하는 비극을 맞긴 했지만, 업무시간 외의 사생활을 보통사람처럼 자유롭게 했다. 노 대통령은 그런 나라를 꿈꿨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이 많았던 청와대 생활은 힘들고 고달팠다고 한다. 회의에서도 담당분야를 벗어난 논의를 지켜볼 때면 졸음이 밀려오기 일쑤였는데, 임기 첫해 문희상 비서실장과 유인태 정무수석이 회의 때 자주 졸기로 유명했다는 것. 문 이사장은 “문희상 실장은 당시 알레르기 약을 먹고 있어서 자주 졸았다. 유인태 수석은 옆에서 보기엔 분명히 졸았던 것 같은데 본인은 눈만 감고 있었을 뿐이라고 늘 우겼다. 그러면서도 회의에서 논의된 내용을 정확하게 꿰고 있는 걸 보면 놀라웠다”고 말했다. 심지어 문 이사장 역시 입을 벌리고 어금니를 치과 드릴로 긁어내는 극한적인 치과치료를 받는 상황에서도 잠이 와 의사한테 혼나는가 하면, 누군가와 둘이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 깜빡 졸음에 빠진 일도 몇 번 있었다고 한다.
◇‘대통령 노무현’ 헌혈 못했던 까닭
취임 첫해 청와대에서 열린 헌혈 행사에서 혈장이 정상보다 묽다는 이유로 노 전 대통령이 사전체크에서 불합격됐었다고 한다. 일종의 과로증세였다고. 그는 “대통령이 피로 때문에 혈장이 묽어져 헌혈을 못했다고 알릴 수는 없어 잠시 의논 끝에 ‘그날 헌혈행사 한다는 걸 깜박 잊고 아침에 약을 드신 바람에 헌혈을 못하게 됐다’고 둘러대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다음 차례인 자신이라도 ‘그림’을 만들어줘야 했는데 그 역시 혈압이 높아 불합격되었다고. 평소 혈압이 높았던 적이 없어 병원에 가보았더니 불과 몇 달 만에 그렇게 높아진 게 사실이었다고 한다.
문 이사장은 “나는 첫 1년 동안 치아를 10개쯤 뽑았다. 나뿐 아니라 이호철 비서관과 양인석 비서관을 비롯해 민정수석실 여러 사람이 치아를 여러 개씩 뺐다”고 밝히기도 했다. “웃기는 것은 우연찮게도 나부터 시작해 직급이 높을수록 뺀 치아 수가 많았다”는 그는 “우리는 이 사실이야말로 직무연관성이 있다는 확실한 증거라며 우스갯소리를 했다”고 말했다.
▲ 노무현 대통령 서거 2주기를 앞두고 봉하마을에 마련됐던 추모관. 윤성호 기자 cybercoc1@ilyo.co.kr |
문 이사장이 참여정부 민정수석실에 부임했을 때 검찰과의 ‘핫라인’이 있었다고 한다. 청와대엔 일반 부처와 연결되는 공용전화 회선이 있는데 유일하게 검찰과의 전용회선이 민정수석실에 연결돼 있었다고 한다. 이것을 바로 끊었고, 또 민정수석실에 검찰이 제공한 차량도 있었는데 이 역시 돌려보냈다고 한다. 그는 “사소한 일 같지만 그런 것들이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훼손한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문 이사장은 최근 시끄러웠던 대검 중수부 폐지 논란에 대한 생각도 밝혔다. 참여정부 시절 대검 중수부를 폐지하지 못했던 배경은 본격 논의 전에 대선자금 수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그는 “이 수사를 중수부가 했고 이 수사로 인해 검찰이 국민들로부터 높은 신뢰를 받게 되는 바람에 중수부 폐지론이 희석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중수부 폐지를 추진하게 되면 마치 대선자금 수사에 대한 보복 같은 인상을 줄 소지가 컸다. 아쉬운 대목이다. 그렇게 하면서까지 지켜준 검찰의 정치적 중립이며 독립이었다”고 밝혔다.
문 이사장은 그런데 “이명박 정부 들어서자마자 그들은 순식간에 과거로 돌아가 버렸다. …검찰을 장악하려 하지 않고 정치적 중립과 독립을 보장해 주려 애썼던 노 대통령이 바로 그 검찰에 의해 정치적 목적의 수사를 당했으니 세상에 이런 허망한 일이 또 있을까 싶다”는 안타까움을 전했다.
◇남북정상회담 성사과정
문 이사장은 2007년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기까지의 비화도 공개했다. 2005년 6월, 6·15 공동선언 5주년을 맞아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정동영 통일부 장관을 특사 자격으로 먼저 평양에 보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만나게 했고 남북정상회담을 열고 싶다는 뜻을 전했지만, 정상회담 이전 안희정 씨와 문성근 씨도 각기 대북접촉을 했었다는 것. 안희정 씨는 2006년 가을께 북측의 제안으로 갔었지만 별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았다고 해 국정원에 알려주고는 그걸로 끝냈고, 문성근 씨는 훨씬 앞선 2003년 가을쯤 대통령의 친서를 갖고 북한을 다녀왔다고 한다. 그는 “정상회담을 추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남북관계에 임하는 노 대통령의 진정성을 이해시키는 수준이었다. 그런 접촉이 분위기 조성에는 도움이 됐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정상회담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 내외가 어떤 방법으로 북한으로 갈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고 한다. 당시 군사분계선을 넘어가는 장면은 의전비서관실 오승록 행정관이 낸 아이디어였다고. 하지만 군사분계선이 아무것도 없고 그냥 포장된 도로라고 해 북측에 양해를 얻어 임시로 선을 긋게 된 것이었다는 것. 평소 작위적인 이벤트를 싫어하는 대통령에게는 “할 수 없이 내가 총대를 메기로 하고 ‘북측하고 이미 그렇게 하기로 합의를 했다’고 보고해 설득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결국 노 전 대통령 내외가 노란색의 군사분계선을 넘는 장면은 성공적이었고, 아이디어를 낸 오승록 행정관은 후에 표창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
문 이사장은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참여정부가 이명박 정부에게 넘긴 정부 기록물 속에는 참여정부 ‘인사검증 매뉴얼’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는 “그것만 제대로 참고해도 참여정부가 겪었던 시행착오는 겪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자기들 나름대로 다른 인사검증 매뉴얼을 별도로 만들었기 때문이라면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김태호 총리 후보 낙마시까지 아예 인사검증 매뉴얼이 없었다. 김태호 후보 낙마 후에야 비로소 200문항의 검증 체크리스트를 만드는 등 매뉴얼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정부 출범 초부터 인사 때마다 낭패를 보면서도 그랬다니 이해하기 힘든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산 쇠고기 파동 당시 촛불시위의 배후로 우리를 의심했다는 얘기 역시 한참 후에 알게 됐다. 정말 놀라운 상상력이고 피해의식이었다”고 꼬집기도 했다. 하지만 정치보복의 시작은 참여정부 사람들에 대한 치졸한 뒷조사였다고. 당시 노 전 대통령은 워낙 억울한 부분이 많아 법률적 대응 외에 정치적 대응을 할까도 고민했었다고 한다. 그는 “끝내 보내진 않았지만 ‘이명박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같은 경우도 그런 차원에서 작성해 놓았다”며 “결국 대통령은 철저하게 법률적 대응을 선택했다”고 밝혔다.
문 이사장은 검찰 조사 당시 이인규 중수부장의 태도에 대해서도 문제 삼았다. 문 이사장은 “그(이인규 중수부장)는 대단해 건방졌다. 말투는 공손했지만 태도엔 오만함과 거만함이 가득 묻어 있었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박(연차) 회장과 대질을 시키겠다는 검찰의 발상 자체가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고 언급했다. 대통령은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박연차 회장에 대한 원망이나 서운한 말씀을 한 번도 안 하셨다”고 밝혔다. 한편 이에 관해 이인규 당시 중수부장은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예우를 다했다. 공손하게 잘 모셨다”고 반박한 바 있다.
그는 책 속에서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가슴 절절한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가끔 꿈에서 그 분을 만난다”는 문 이사장은 “내 인생에서 노무현은 무엇인가. 그는 내 삶을 굉장히 많이 규정했다.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의 삶은 전혀 달랐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운명이다. …그가 남긴 숙제가 있다면 그 시대적 소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라며 앞날에 대한 ‘각오’를 내비치기도 했다. 문 이사장은 지난 16일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 노 전 대통령의 묘소에 이 책을 헌정하며 “대통령의 정신과 가치는 앞으로 저희가 영원히 계승, 발전시켜 나갈 것이고 이 책을 바치는 것은 그런 작은 노력의 시작”이라고 밝혔다.
조성아 기자 lilychic@ilyo.co.kr
살아서 죽어서 두번 겪었다
80년대 부산 지역에서 인권·노동 변호사로 이름을 알리던 노 전 대통령은 너무 열심히 일을 해서 후배 변호사들에게 부담을 줄 정도였다고 한다. 문 이사장은 “‘노 변호사는 무료변론에 법정에서 같이 싸워도 주는데 당신은 그렇게 안 해주냐’고 하니 어쩌겠는가. 너무 헌신적인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노무현 변호사는 87년 6월 항쟁 이후 대우조선 노동자들을 돕다가 ‘3자 개입’과 ‘장례식 방해’ 혐의로 걸린 적도 있다고 한다. 문 이사장은 “아마 대한민국 역사상 장례식 방해라는 죄명은 처음이었을 것”이라며 “한참 후에 민주당 백원우 의원이 노 대통령 영결식에서 같은 혐의로 기소됐다. 내가 아는 한, 단 두 건의 ‘장례식 방해’ 사건. 나는 그중 하나는 직접 변론을 맡고 다른 하나는 증인을 섰으니, 이 역시 기막힌 인연”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조]
“다들 말뚝 박으라더라”
최근 문재인 이사장이 특전사 출신이었다는 사실이 전해지며 새삼 화제가 되고 있다. 책 속에서 그는 특전사 시절의 추억과 고생담을 소개했다. 1975년 8월 강제징집으로 입대한 문재인 이사장은 특전사로 배치 받게 되는데, 그가 과거에 데모를 한 이력 때문에 ‘신원특이자’ 신분이었기 때문. 특수전 훈련 때 그는 폭파 주특기를 부여받아 공수병이자 폭파병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6주간의 특수전 훈련을 마칠 때 폭파과정 최우수 표창을 받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학교 다닐 때 개근상 말고는 상을 받아보지 못했다”는 그는 “사격, 수류탄 던지기, 전투수영 등 생전 처음 하는 일을 내가 잘하는 것이 스스로도 신기했다”고 말했다.
또한 상병 때 겪은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당시에는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준 전시태세가 갖춰져, 미루나무 제거조로 투입돼 당시 잘라온 나무토막을 넣은 기념물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공수부대 복무 중에 특히 공중낙하를 하다가 허리나 다리를 다치는 사고가 종종 일어났다. …다들 나보고 군대 체질, 공수부대 체질이라며 말뚝 박으라고 농담을 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