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중-일 대표로 나선 이세돌, 구리, 이야마(왼쪽부터). |
2003년에는 조치훈 9단이 제8회 삼성화재배 결승3번기에서 한국의 박영훈 4단(당시)을 2 대 1로 누르고 우승했고, 2000년에는 왕리청 9단이 제2회 춘란배 결승에서 중국 마샤오춘 9단을 격파하고 우승했다. 하나만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97년 제10회 후지쓰배에서 고바야시 고이치 9단이 왕리청 9단과 결승을 치러 우승을 차지했다. 그나마 조치훈은 한국, 왕리청과 장쉬는 대만이고, TV 아시아선수권전은 속기전이니 순수 일본의 세계대회 개인전 우승은 1997년이 마지막이었다. 그때부터 따지자면 이번 이야마 우승은 14년 만인 것.
물론 이번에도 공식 기전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세돌, 구리와 겨루어 일구어낸 것이니 의미는 컸다.
대전 방식이 재미있었다. 세 사람이 풀리그를 벌인 게 아니다. 제비를 뽑아 1회전은 이세돌과 이야마가 먼저 대국하는 형식으로 벌어졌고, 거기서 진 사람이 이튿날 기다리고 있던 구리와 2회전을 벌였다. 그리고 다시 다음날은 1회전 승자와 2회전 승자가 대결하는 3회전을 벌였는데 여기서 승자가 우승하는 것.
처음에 맞붙은 이세돌과 이야마가 우승할 확률은 각각 8분의 3, 부전을 뽑은 구리의 우승 확률은 8분의 2, 따라서 먼저 둔 이세돌과 이야마가 거꾸로 8분의 1만큼 유리했다는 것이다.
대회 전 예상은 이세돌이냐, 구리냐였다. 3파전이라고 본 사람은 당연히 거의 없었다.
이야마가 우승한 것이 뜻밖인 것은 맞다. 그러나 뜻밖이었던 것은 이야마의 우승이 아니라 이야마의 바둑 내용이었다. 이세돌에게 완승을 거두었다. 이세돌-이야마 대국을 앞두고 한국의 프로-아마 고수 중에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전망한 사람이 있기는 있었다.
“이세돌이 자유분방하고 독특한 행마에 전투가 엄청 세지만, 이야마는 대신 기본기가 아주 충실해 여간해서는 잘 무너지지 않는 스타일이다. 이세돌이 가끔 질 때를 보면 상대가 맞붙어 싸우는 사람이 아니라 기본에 입각해 국면을 두텁게 운영하는 기사인 경우인데, 이야마가 바로 후자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야마도 수읽기는 놀라울 정도로 깊고 정밀하다. 이세돌은 폭풍처럼 몰아치는 스타일인데, 이야마에게도 그런 식으로 나가다간 걸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불행하게도 그 희박한 가능성의 그 예상이 들어맞았다. 이세돌은 몰아쳤으나 대세를 휘어잡지 못했고 집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중반 이후 이세돌은 득의의 흔들기로 온 판을 휘저었지만 이야마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야마-구리의 대국은 구리로서는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작품이었다. 나중에는 여기저기 찢긴 중앙의 돌들이 전부 함몰하는 수모를 당했다. 이세돌과 구리가 이야마를 경시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바둑 내용만으로는 경적필패라고 해도 할 말이 없는 그것이었다.
일본기원은 축제 분위기. 이야마의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생중계를 하던 일본기원 사무국에서는 만세 환호가 터져 나왔다고 한다.
이야마는 1989년생. 이제 스물한 살이다. 나이가 일단 가능성이 있다. 현재 서열 2위 ‘명인’과 4위 ‘십단’을 갖고 있으며, 서열 1위 ‘기성’과 6위 ‘왕좌’를 지키고 있는 장쉬 9단과 경쟁하고 있다. ‘기성’이 ‘명인’보다 위이므로 제일인자는 장쉬지만, 타이틀의 질로는 비등하다.
무엇보다 일본은 아직도 제한시간 각자 8시간짜리 바둑이 있다. 전통의 힘이 있으며 대국의 의전이나 대국자에 대한 예우, 일반인이 바둑을 대하는 시선과 자세 등 바둑의 문화적 온축은 정말 본받을 만하다. 바둑을 체육이라고 성급하게 우기지도 않으며 10초 바둑 같은 것은 별로 설 자리가 없다. 실력과 성적을 떠나 그게 부럽다.
이광구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