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위 징크스로 유명한 김송희 프로는 최근 미국 골프잡지가 선정한 유망한 스타 10명에 포함되기도 했다. |
답은 1번과 2번 둘 다다. 1등은 지켜야 하기 때문에 1등하고도 불안하고, 2등은 1등 못한 것을 분하게 여긴다. 그렇다면 가장 마음이 편안한 사람은? 중간일 것 같지만, 정답은 꼴등이다. 중간은 어떤 일이든 완전히 올인하기도 아예 포기하기도 애매하기 때문에 할 건지 말 건지에 대한 스트레스가 있다. 그러나 꼴등이 마음은 편하다. 더 내려갈 데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지만 주위사람은 물론 본인도 기대가 아예 없다. 꼴등은 속이 태평하다. 그렇다면 골프에서는 어떨까?
위의 질문을 골프선수들에게 적용한다면, 가장 마음이 불편한 선수는? 짐작대로 2등한 선수다. 2등을 많이 한 선수일수록 더욱 그렇다. 골프뿐만 아니라 다른 스포츠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골프는 2등 선수를 기억하지 않는다. 모든 스포트라이트는 우승자에게 집중된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가 아니다. 골프에는 ‘스트레스는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다. 스트레스는 2등이 제일 많이 받는다. 우승을 많이 한 선수들을 인터뷰하면 공통적으로 듣는 대답이 있다.
“치고 올라오는 상대방을 의식했나요?”
“아니요, 제 게임에 집중하느라 몰랐습니다.”
골프를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하는 이유다.
여기 ‘준우승 전문가’ ‘새가슴’ ‘2등 징크스’ 기타 달갑지 않은 꼬리표가 따라다니는 선수가 있다. 2007년 LPGA투어 데뷔 이후, 97경기를 치렀다. 그 가운데 ‘톱10’에만 무려 35차례 들었지만 한 번도 우승을 못하고 2등 다섯 번, 3등 여섯 번을 기록했다. 바로 김송희 선수다.
김송희는 2004∼2005년 국가대표로 활동한 유망주 중의 유망주였다. 고교 시절 최나연 박인비 오지영 신지애 등과 함께 주니어 무대를 휩쓸었다. 최근에 미국의 골프잡지 <골프위크>는 2011년 신인과 기존 선수를 망라한 LPGA의 떠오르는 스타 10명을 선정했다. 한국 및 한국계 선수로 김송희가 4위로 가장 높은 순위에 올랐다. <골프위크>는 김송희를 ‘조용한 한국의 상금기계’라 칭했고 ‘부담만 털어내고 우승 맛을 본다면 다승이 가능한 선수’라고 평가했다.
주로 미국 무대에서만 활동하기 때문에 한국에는 1년에 한두 번 들어오는 그녀다. 지난해 소속사가 주최한 KLPGA 메이저대회 하이트컵 챔피언십 마지막 라운드 날이었다. 1, 2라운드의 부진을 털고 김송희 선수가 우승권에 진입했다. 중계방송을 하던 나는 안쓰러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첫날 연습 그린에서 만났던 그녀의 말이 새록새록 생각났기 때문이다.
“김 프로님, 기분이 어때요?”
“그냥 그래요.”
“왜 그냥 그래? 이번에는 예감이 좋은데….”
시합도 하기 전에 왠지 어깨가 처진 그녀를 위로하기 위한 말이었다.
“새가슴이란 말을 언론에서 자꾸 해서 별로 기분이 안 좋아요.”
“저 요즘 멘탈 훈련도 열심히 받고 있어요.”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보이시하지만 만나서 대화를 해보면 수줍음을 많이 타는 여린 소녀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질문을 할 수 없었다. 마지막 라운드 날 그녀가 많은 사람들이 꼽는 우승후보답게 선두권을 형성하자 기죽어 있던 첫날의 얼굴 표정이 자꾸 떠올랐다. 생방송 5분 전에 갑자기 ‘긴급’이라는 표시를 한 문자 한 통이 왔다. 중계방송 하는데 요긴한 정보를 주는 협회 고형승 과장이 보낸 문자였다. ‘지금 최나연 프로가 김송희 프로 응원하러 갤러리로 쫓아다니고 있습니다. 오늘 1번 홀부터 함께하고 있습니다.’
가슴이 뭉클했다. 마음이 느껴졌다. 아무리 절친한 친구라 하더라도 본인이 출전도 안한 대회에 스타 선수가 친구를 응원하기 위해 갤러리로 함께 다녀준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더구나 최나연 선수는 바로 다음에 있을 LPGA 대회를 한창 준비 중이었다.
이날 김송희 선수는 우승하지 못했고 그 다음 대회에서 최나연 선수는 친구와의 경쟁 끝에 우승을 했다.
결과로만 본다면 김송희 선수는 할 말이 없다. 준우승을 할 때마다 언론에서 하는 듣기 싫은 말들도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 가슴이 아프다. 캐스터는 감정을 내세워서는 안 된다. 선수가 어떠한 상황에 처하든지 최대한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그 사실을 전달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직도 많이 부족한 캐스터다. 마지막 날 김송희 선수가 흔들릴 때마다 마음이 아파 나도 모르게 감정이 실린 멘트를 많이 했다.
아마 지금 김송희 선수 본인만큼 힘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부모님도 코치도 소속사도 그녀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2등을 오래 하면 할수록 꼬리표가 길어지면 길수록 더욱 그렇다. 섣부른 위로도 부담이 될 수 있다. 그렇다고 아무 말도 안하면 그것 또한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 이겨내는 것도 견뎌내는 것도 선수의 몫이다. 지금 그녀를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가 아니다. 그 누구도 아니다. 그녀 자신뿐이다.
언젠가는 김송희 선수가 우승할 날이 올 것이다. 올 것이라 믿는다. 만일 내가 중계하는 방송에서 그녀가 첫 우승을 한다면 아마 나는 ‘자제력을 잃은 캐스터의 흥분 멘트’로 인터넷 검색순위에 올라올지도 모른다.^^
그때 기억사항을 나의 중계방송 다이어리에 미리 적어놓았다.
1. 김송희가 첫승 하는 것을 방송할 경우, 감정을 숨기지 말고 언니처럼 따듯하게 축하해줄 것!
2. 잊지 말 사항! 김송희 선수에게 우승을 뺏긴 2등 선수에게 격려의 멘트를 반드시 할 것!
특히 우승 해본 적이 없는 선수라면 이름을 한 번 더 얘기하고 수고했다는 말을 꼭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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