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돌이 구리를 녹였다.”
구리가 돌을 거두고, 이세돌이 우승컵을 안는 순간 인터넷 바둑사이트에 제일 먼저 뜬 누리꾼의 댓글이었다. 이세돌 9단이 4월 28일 한국기원 바둑TV 스튜디오에서 열린 제3회 BC카드배 결승5번기 5국에서 흑을 들고 구리 9단에게 207수 만에 불계승, 종합 전적 3승2패로 타이틀을 차지하며 대회를 2연패했다. 스코어가 일진일퇴였다면 내용은 세계 정상의 대결, 세계 최고의 무대답게 실로 용호상박 그것이었다. 두 사람의 착점은 늘 예측 불허였고, 초강수였다. 그 활극이 얼마나 숨 막히게 짜릿하고 흥미만점이었던지 제5국 생중계 때, 한 인터넷 바둑 사이트는 동시 접속자가 3만 명을 초과할 정도였다.
이세돌과 구리는 정말 팽팽하다. 1983년생 동갑. 생일은 이세돌이 3월 2일, 구리가 2월 3일, 숫자가 바뀌었는데 구리가 한 달 빠르다. 1995년 입단연도도 같다. 인연이라 아니할 수 없다. 우승컵 숫자도 34개로 같다. 다만 국제무대 성적은 이세돌이 앞선다. 이세돌은 34개 중에 세계타이틀이 13개, 구리는 7개. 두 사람 사이의 전적도 비공식전을 포함해 11승 11패로 동률이었다.
공식전은 구리가 10승 7패로 앞서 있었는데, 이번 5번기로 이세돌이 공식전은 10승 12패로 아직 조금 뒤지고 있지만, 비공식 포함에서는 14승 13패로 한 발 앞서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타이틀 매치는 이제 1승1패. 2009년 제13회 LG배 결승에서 처음 만나 구리가 이겼고 이번 BC카드배에서 이세돌이 빚을 갚았다.
<장면>은 이번 드라마의 하이라이트. 우하귀에서 1차 접전이 끝나고 우상귀에서 2라운드. 1라운드에서는 이세돌이 점수를 땄다는 것이 검토실의 설명. 흑1 몰 때 백2, 패로 받는 것은 당연해 보였고, 또 큰 패싸움이 벌어지나 싶었다.
<1도> 실전진행이다. 흑1로 따내고 백이 우하귀 2로 팻감을 쓰자 이 9단은 쳐다보지도 않고, 흑A로 잊지 않고, 노타임으로, 3으로 따내 패를 해소했다. 바꾸자는 것. 우하귀 흑을 잡는 것은 27집 정도. 우상귀 백을 잡는 것은? 자체 크기는 비슷하나 시쳇말로 영양가는 더 높다는 것. 과연 구리는?
<2도>를 보자. 우하귀는 원래도 흑이 가일수하지 않으면 패가 나는 곳이었다고 한다. 백1이 급소. 흑2쪽을 이을 수밖에 없을 때 백3을 선수하고 5로 젖힌 후 7로 패 모양을 만드는 수가 있다는 것. 다만 이건 한 수 늘어진 패여서 백도 결행하려면 생각을 좀 해야 한다는 것.
<3도>를 보자. 만약 우변 1선에 백 가 있다면, 우하귀는 <2도> 말고도, <2도> 흑4 다음 백1로 치중하는 수도 있다는 것. 흑의 응수는 2뿐인데, 백3으로 들어가 이제는 한 수 늘어진 패가 아니라, 흑4 다음 백A로 따내고, 흑B로 몰아 단패가 된다는 것. 백1 때 흑2로 3에서 막는 것은 백C로 넘어가고, 백1 때 흑C로 차단하는 것은 백3으로 들어가 이건 흑이 그냥 잡힌다. 따라서 백는 절대 선수. 이게 선수면 백D까지 들어갈 수 있으니 우변 흑진은 보기보다 그렇게 큰 집은 아니라는 것. 그건 그런데….
<4도> 실전진행이다. 구리 9단은 우하귀 흑을 잡지 않고, 백1로 상변을 넘어갔다. 일단 검토실을 흥분시킨 수였다. “구리 9단이 심적 동요를 일으킨 모양이다. 이럴 거라면 패는 왜 했나. 왔다 갔다, 일관성이 없지 않은가. 이 9단의 기세, 배짱이 통했다. 일거에 승기를 잡은 모습”이라는 것.
그러나 잠시 후 백1에 대한 다른 설명이 있었다. 그냥 넘어갔으면 백은 후수. 실전은 흑4를 유도했으니 백이 선수. 패를 해서 백이 손해를 감수-자초한 것은 선수를 잡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또 우변 흑진은, 방금 말했듯 백A가 선수. 그걸 발판으로 B로 들어가는 수가 있다는 것. 실전에서도 나중에 백은 A를 생략한 채 B로 들어갔다. 어쨌거나 흑은 8로 두텁게 잇고 10으로 젖혀 기세등등이다.
<5도>를 보자. 한참 진행이 된 상황. 백이 거의 따라와 미세해진 모습이란다. 백1, 중앙 흑집을 견제하면서 아래쪽 흑돌을 겨냥한다. 여기서 검토실은 “참 어려운 장면이다. 느낌으로 흑이 조금 나은 것 같기는 하지만, 차이가 얼마인지 가늠이 안 된다. 흑이 하변을 어떻게 정리하느냐, 그리고 선수를 잡아 중앙을 지킬 수 있느냐인데, 어떻게 두 가지를 할 수 있을지…”,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었는데, 이 9단이 해답을 보여 주었다.
<6도> 흑1로 백2와 교환한 후 3으로 여기를 찌르고 5로 갖다붙인 후. 백6에는 흑7로 젖혀 백8, 10과 문답하고 11로 돌아간 것. 하변을 정리하고 중앙을 지키는 것, 두 가지를 완수했다. 흑A가 선수여서 백B가 없어졌다는 부수입도 챙긴 것. “두어지고 보면 그리 어려운 수순은 아니지만, 실전에서 이런 수순을 찾아내 밟아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현란하고 정확하고 정밀하다. 이런 걸 본 것만으로도 오늘 관전한 보람이 크다. 이걸로 흑이 최소 한집반은 확실히 남기는 것 같다. 이세돌 정말 잘 둔다.” 검토실의 찬사였다.
이광구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