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디 평가를 하는 골프장들이 늘어나고 있다. 간단한 방식이지만, 선택의 순간 잠시 망설이게 된다. 탁월, 우수, 보통, 불만족으로 구획을 나눈 통에 오늘 나를 보조해준 캐디 이름을 집어넣으면 되는데, 이 방식이 좀 불편하다. 캐디에게 이런저런 불만이 있었더라도 대부분은 보통 이상의 성적을 주게 된다. 혹시라도 평가 때문에 불이익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마음을 약하게 만든다. 남을 평가한다는 것, 그것도 처음 만난 타인을 평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골프는 항상 반전이 존재한다. 얼마 전 모 회원제 골프장을 찾았을 때였다. 회원 한 명과 비회원 3명의 라운드였다. 자연히 회원이 분위기를 주도했다. 앞자리에 앉아서 그 골프장 캐디들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친분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나 오랜만에 왔는데, 나랑 라운드 한 적 있나?”
“처음인데요, 그런데 저 회원님 알아요. 차 엄청 많잖아요!”
“어! 그걸 어떻게…”
일행 모두 귀가 쫑긋해졌다. 캐디들의 비밀정보공유가 공개된 순간이었다. 캐디들이 진상고객들을 파악하기 위해서 미리 고객 정보를 주고받는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구체적으로 사실을 확인 한 적은 없었다. 일반적으로 캐디들의 고객 평가는 ‘채를 여러 번 가져다 달라’고 한다거나 ‘퍼팅 라인을 놔주면 무조건 캐디 탓’을 한다거나 하는 ‘플레이 스타일’과 관련된 얘기가 주된 것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강한 호기심이 발동돼서 취재를 시작했다. 그런데 나의 짐작 보다 그녀들의 고객 평가는 훨씬 세밀했다. 결과가 다소 충격적이었다.
아무개 사장: 차를 무지 좋아함, 골프보다는 차 얘기에 관심이 많음, 외제차 수입하는 회사 운영 중, 딸 얘기를 많이 하는 것으로 봐서 다행히 가정적임, 늘 앞자리에 앉아서 말을 많이 시킴, 안 맞으면 화를 내지만 뒤끝은 없음.
그날 캐디수첩에서 얻어낸 그에 대한 정보의 일부분이다(차마 공개할 수 없는 내용도 있었다). 줄기차게 취재했더니 결국 얘기해 줬는데, 평가 내용이 섬뜩했다. 취미, 관심사, 직업, 가정사, 성격 등이 모두 망라되어 있는 게 아닌가. 탁월, 우수, 보통, 불만족 평가서와는 비교가 안됐다.
누군가 나를 평가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도 깜짝 놀랄 정도로 구체적이다. 나도 몰랐던 나 자신이 그 속에 있다. 그동안 그녀에게 내 속을 너무 많이 보였다면 호칭부터 바꿔라! ‘언니야’는 절대 쓰면 안 된다. 그녀는 자기 이름을 갖고 있는 냉정한 평가자다.
SBS 아나운서 최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