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퇴근하면 씻고 바로 쉬고 싶은 것이 대부분 직장인의 심정이지만 그렇다고 집안일을 나 몰라라 할 수 없다. 건설회사에 근무하는 L 씨(29)는 싱글족에 미혼남이다. 취업 후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 온 그는 초반에 집안일 때문에 애를 많이 먹었다. 부모님이 챙겨주는 것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제법 노하우가 생겼다.
“입사 후 출근할 때면 우왕좌왕했죠. 지금은 주말에 한꺼번에 해결하는, 일종의 규칙 같은 걸 세워서 실천하고 있어요. 그냥 두다가 그때그때 눈에 보일 때 하면 급할 때 허둥대거든요. 빨래는 토요일 아침, 다림질과 빨래 개기는 일요일 저녁 뭐 이런 식이에요. 청소기는 퇴근 후 살짝 한번 돌리고 토요일 점심때는 걸레질까지 하는 대청소를 합니다. 식사도 되도록 집에서 해결하려고 노력해요. 일단 주말에 밥을 할 때 왕창 해요. 1인분씩 따로 담아서 냉동실에 얼린 후 먹을 때마다 전자레인지에 돌립니다. 찌개도 들어가는 재료들을 다 썬 다음 1인분씩 비닐에 담고 얼려요. 그리고 나중에 작은 뚝배기에 된장만 넣고 끓이는 거죠.”
패션 관련 회사에 다니는 J 씨(여·28)는 취업 후 부모님 집을 나와 여동생과 함께 살고 있다. 독립 초기에는 동생이 집안일에 신경을 쓰지 않아 스트레스가 많았다. 차라리 혼자면 아무 생각 없이 집안일을 하겠지만 한 살 터울 동생이 손을 놀리고 있으니 억울한 느낌이 들었다고.
“똑같이 힘들게 직장생활을 하는데 저만 집안일에 신경 쓰는 것 같아서 스트레스가 많았어요. 이러다가는 자매끼리 의상하겠더라고요. 그렇다고 시키면 대충하거나 기분 나쁘게 받아들여서 그것도 힘들었죠. 그래서 어느 날 해야 할 집안 일 목록을 들고 동생을 앞에 앉혔어요. 그리고 내가 이만큼 할 테니 너도 하라고 했어요. 그래도 내가 할 일이 훨씬 많다는 걸 강조하면서요. 이 방법이 먹혀서 지금은 일손이 하나 더 생긴 것 같은 기분이에요. 제가 집안일을 더 많이 하지만 적어도 퇴근 후에 산처럼 쌓인 설거지거리를 보는 일은 없어졌거든요.”
가사 스트레스 ‘종결자’는 단연 맞벌이 부부다. 직장 생활 힘든 건 마찬가지라 어느 한쪽이 도맡아 할 수 없는 게 현실이지만 실제로는 아내에게 그 몫이 주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최근에는 협조적인 남편들이 꽤 늘었다. 무역회사에 근무하는 B 씨(35)는 가사노동에 투자하는 시간이 많다.
“솔직히 회사 일만 신경 쓰고 싶지만 같이 직장생활 하면서 그럴 순 없죠. 아내가 몸이 약해서 제가 같이 하지 않으면 오히려 나중에 더 큰 일이 생기겠더군요. 아침에는 아내가 화장도 해야 하고 출근준비 하는 데 더 오래 걸리니까 제가 아이 아침을 챙깁니다. 어린이집 등교까지 제가 맡고 있어요. 대신 저녁은 아내 몫입니다. 식사준비를 아내가 했다면 설거지는 제가 하고, 아내가 빨래를 하고 꺼내서 널면 제가 마른 후 개는 식입니다. 청소도 마찬가지예요. 한 사람이 청소기를 돌리면 다른 사람은 걸레질을 해요. 이렇게 하니까 일도 더 빨리 끝나요. 대신 서로 같이 해야겠다는 인식이 있지 않으면 하기 힘들죠.”
금융업계의 C 씨(32)도 협조적인 편에 속한다. 결혼 전에 약속한 것을 지키기 위해 처음에는 애를 썼다. 하지만 쉽지가 않았다.
“심정적으로는 당연히 같이 해야지 했지만 실천이 어려웠어요. 잦은 야근에 업무가 많아서 집안일까지 신경 쓰는 건 매일 고역이었죠. 물론 아내도 같이 직장생활하고 힘든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괴로웠습니다. 결국 기계의 힘을 빌리게 됐어요. 식기세척기를 샀고, 로봇청소기도 구입했습니다. 와이셔츠는 전문 세탁소에 맡겼어요. 아침에 출근할 때 로봇청소기를 돌려놓고 나가면 적어도 머리카락이나 먼지가 공처럼 뭉쳐 굴러다니는 일은 없더군요. 그래도 기계로는 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좀 있어요. 일주일에 한 번씩은 가사도우미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 둘 다 직장생활을 할 때는 시간 투자를 비용으로 계산해도 지금 방법이 나은 것 같아요.”
이렇게 협조적인 남편들을 만나면 직장여성들의 고민은 한결 줄어든다. 그러나 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그런 좋은 남편은 많지 않다. 회사에서 받는 스트레스도 모자라 남편들의 비협조적인 태도로 받는 스트레스까지 겹쳐지면 몸져눕기 십상이다. 이런 직장여성들이 집안일 스트레스를 줄이는 방법도 있다. 일종의 ‘투쟁’이다. IT회사에 근무하는 A 씨(여·30)는 ‘준법투쟁’을 벌였다.
“결혼 전 남편이 깔끔한 성격이라 나중에 집안일을 잘 도와주겠거니 했어요. 막상 결혼하니 예상과는 달리 집안일은 전적으로 제 몫이 되더군요. 몇 번 같이 하자고 해봤지만 하는 둥 마는 둥 하거나 안 그래도 회사일로 지쳤는데 퇴근하자마자 잔소리만 한다는 식으로 핀잔만 주더라고요. 그래서 언젠가부터 집안일을 하긴 하되 정말 대충했어요. 설거지도 막 쌓아놓고, 청소도 청소기만 살짝 돌리니 먼지가 앉기 시작했죠. 옷도 아무렇게나 구겨 넣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본인이 참다못했는지 다시 깨끗하게 해놓고 대충 처리된 집안일을 마무리하더라고요. 이제는 몸에 배어서 집안일을 같이 해요.”
가구업체에 다니는 H 씨(여·29)는 집안일로 몇 번의 큰 싸움에 스트레스가 많아져서 파격적인 방법을 택했다. 바로 ‘전면파업’이었다.
“파업을 선언하고 집안일을 일체 하지 않았어요. 극단적인 방법이라 많은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진 않지만 저는 효과적이었어요. 퇴근하면 바로 소파에 누워 TV 리모컨만 돌리던 사람이었는데 파업 4일 만에 청소기를 돌리더라고요. 식사도 먼저 준비하더군요. 이후로는 협조적인 남편으로 변했습니다. 같이 직장생활하면서 배우자의 도움 없이 집안일을 한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어요.”
사람이 살아가려면 집안일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닌, 꼭 해야만 하는 일이다. 싱글족이라면 쌓아 놓지 말고 그때그때 처리하는 부지런함이 필요하고 맞벌이 부부라면 함께 해야 할 일로 인식하는 마인드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보다 집안일로 받는 스트레스를 먼저 해결하는 게 더 쉽고 빠르지 않을까.
이다영 객원기자 dylee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