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 바둑대회가 한·중·일의 독식으로 ‘무늬만 세계대회’라는 지적을 받아왔다.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각 나라의 바둑인들이 참가한 세계 경제인 대회, 유럽선수권전, 국무총리배세계대회. |
스카이바둑도 열심히 따라오고 있다. 아직 선의의 경쟁 운운할 정도는 아니지만, 어쨌든 중도포기하지 않고 살아남은 것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며 그동안 경쟁상대는 아니더라도 자금과 인력의 현저한 열세에도 불구하고 그 나름으로 선발 주자를 견제하는 역할을 해 온 것은 평가받을 만한 일이다.
스카이바둑은 새로운 의욕 충전의 의미로 이름을 바꾸고 신장개업을 선언하면서 요즘 프로그램을 대폭 개편하고 있다. 대륙 간 바둑대회를 개최하는 것도 물론 그의 일환이다.
대회 요강을 보니 개인전이 아니고 단체전이며 지금까지 열렸던 세계대회와는 다르게, 국가대항전이 아니라 아시아, 유럽, 아메리카-아프리카, 세 대륙에서 각각 다섯 나라들이 연합군을 만들어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대륙 간 대회인데, 그것도 일단 신선하거니와 그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한·중·일이 빠진다는 것.
발상의 전환이다. 한·중·일을 빼고 무슨 세계바둑대회를 열 수 있을까, 한·중·일이 없는 세계바둑대회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고, 그게 상식이었던 것인데, 거꾸로 기존 세계대회는 말이 세계대회지 사실은 한·중·일의 대회고 나머지 나라들은 ‘세계대회’라는 타이틀을 위한 찬조 출연자 아닌가. 아무튼 각 대륙 연합군의 면면은 다음과 같다.
▲아시아 : 인도네시아 몽골 태국 이스라엘 싱가포르 ▲유럽 : 헝가리 슬로바키아 독일 세르비아 체코 ▲아메리카-아프리카(월드연합팀) : 아르헨티나 캐나다 멕시코 칠레 남아공
궁금한 건 참가자들의 실력인데, 그래도 15명 가운데 제일 약한 선수가 아마 2단이고 4단이 3명, 5단이 5명에 아마 6단이 6명이나 된다. 요즘은 공인 아마6단이라면 한·중·일이나 그밖의 다른 나라들이나 큰 차이가 없다. 물론 한·중·일이 낫기는 하지만 경적하다가는 당한다. 세 대륙의 대결 방식은 우리 농심배와 같다. 먼저 두 대륙이 붙고, 이긴 대륙이 계속 상대를 바꿔가며 질 때까지 두는 것. 이른바 풍차돌리기다.
격세지감이다. 한·중·일이 빠진 상태에서 몽골과 이스라엘, 칠레와 남아공 선수들이 팀을 이루어 세계대회를 펼치게 되었다니 말이다. 바둑으로는 ‘듣보잡의 잔치’다. 그러나 K-바둑이 생각은 잘했다는 느낌이다. 틈새시장을 잘 골라내 제대로 공략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대회도 생길 때가 되었다. 바둑의 세계화, 세계보급에서는 이런 대회가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선생님들과 노는 것도 감지덕지지만, 재미있기로야 얘들끼리 우리끼리 노는 게 최고가 아닌가.
다만 처음이어서 그런 것이겠지만, 연합군의 나라들 숫자가 좀 적다. 아시아에서는 베트남은 부르고 싶은 나라다. 동유럽이 주축인 유럽에서 러시아가 빠진 것과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같은 서구 쪽이 참가하지 않은 것이 아쉽고, 월드연합팀이라고 하는 아메리카-아프리카 팀에서 미국은 왜 빠졌는지 궁금하다.
또 오프라인 대회이면서 제한시간 각자 10분에 30초 초읽기 3회로 정한 것은 이상하다. 나흘 동안 12라운드를 치르는데 뭐가 그리 바쁘다고 10분 번개 바둑을 두려는 것인지. 유럽처럼 2시간, 3시간으로 하는 것은 그렇다 쳐도, 중국처럼 1시간 반 정도는 아닐지언정 최소 30분은 줘야 한다는 생각이다.
K-바둑은 대회 모든 대국을 녹화·중계한다고 하는데, 생초보를 위한 강의용이라면 모를까, 아마 2단과 4단이 후다닥 번갯불에 콩 볶듯 둔 바둑을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는지. 아마 6단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지금 아직 시작 전이니 이제라도 바꿀 것을 권한다. 10분 바둑은 인터넷에서 고수들이 즐기는 방식이다.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바둑을 세계화한다면서 바둑 후진국들에게 별로 바람직스럽지 않은 방식을 가르쳐 줄 이유가 없다. 대회는 대회답게, 진지하게 임하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기껏 돈 들여 잔치를 하면서 막상 바둑은 장난처럼 두게 할 것 같아 우려된다.
2년 전쯤 돌연 은퇴를 선언하고 행방이 묘연해진 프로기사 문용직 4단이 올 2월쯤 돌아와 - 은퇴를 번복한 것은 아니다 - 사이버오로에 다시 글을 쓰더니 엊그제 연재를 마치면서 또다시 어디론가 떠날 것 같은 뉘앙스의 인사말을 남겼다. 지금은 공주 어딘가에 있다는 소문인데 앞으로 거처를 또 옮길지도 모르겠다.
그가 인사말에서 “요즘 기사론이 사라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동감이다. 예전에 조훈현 조치훈 서봉수 녜웨이핑 마샤오춘 사카다 후지사와 린하이펑 다케미야 가토 고바야시, 이런 사람들은 사람과 바둑이 동시에 연상되었다. 개성이 뚜렷했고 색깔이 분명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떤 게 누구 바둑인지, 다 비슷비슷해졌다는 것이다. 이런 논의는 따로 길게 얘기해야 할 사안이겠지만, 요컨대 단체전과 속기, 특히 속기 일변도로 치닫고 있는 현재의 바둑 흐름이 ‘기풍의 몰개성화’의 주원인 같다는 것이다.
그렇다. 문 박사의 글이 실리기 며칠 전에, 우연히 바둑 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화제가 되었던 게 바로 그 얘기였다. 초속기는 구경하기만 좋을 뿐 재미도 내용도 없다. 버리진 못하겠지만 경계대상이다.
대회를 왕십리 지하철 민자역사에서 펼치는 것은 민자역사 회사가 바둑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 덕분이다. 대회를 후원하고 있는 것. 이런 곳이 꽤 있을 텐데, 계속 나오기를 바란다.
이광구 바둑전문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