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 심신상실·심신미약 솜방망이 처벌 적지 않아…유가족 2차 피해, 오랜 싸움 끝 입법 이루기도
일본에는 ‘도리마(길거리 악마)’라는 신조어가 있다. 길에서 다수의 시민을 무차별하게 살해하는 범죄자를 일컫는 말이다. 다만 과거 일본의 판결을 보면, 묻지마식 범행일 경우 극형을 면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정신감정이 이뤄진 결과, 범인이 이른바 ‘심신상실’ ‘심신미약’ 상태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수사단계에서 심신상실로 인정돼 기소조차 되지 않은 사건도 있었다.
일례로 1984년 요코하마시에서 남성 A 씨가 무차별적으로 흉기를 휘둘러 고교생 4명이 크게 다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한 명이 사망했지만, 범인은 심신상실로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이후 유족이 검찰심사회에 심사를 제기해 재수사를 요구했으나 불기소 처분은 번복되지 않았다.
1990년에도 충격적인 무차별 살상사건이 일어났다. 마쓰모토시에서 게이트볼을 하고 있던 고령자들을 금속배트로 습격해 3명이 숨지고, 1명이 다치는 사건이 벌어진 것. 범인은 당시 대학생이었던 21세의 젊은이였다. 피해자가 즉사할 정도로 강렬한 살의가 엿보였으나, 이번 역시 심신상실로 불기소 처분됐다. 유족들은 “범인을 멀리 떨어진 곳으로 데려가주길 바랄 뿐”이라며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관련, 주간여성은 “범인의 ‘통원치료 이력’이 알려지면 흡사 피해자인 것처럼 ‘보호의 베일’에 가려지고, 사건 자체가 보도되지 않는 시대가 이어졌다”고 전했다. 한편으로는 정신적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과 그의 가족들은 사건이 터질 때마다 편견에 시달리고 범인과 싸잡아서 매도를 당하는 괴로움도 겪었다.
2005년 가가와현에서는 이런 사건도 있었다. 28세 남성이 피살됐는데, 백주 대낮 식당주차장에서 빚어진 참극이었다. 체포된 범인은 “피해자와 일면식이 없고 (살인의 대상이) 누구라도 좋았다”고 밝혔다. 현지 언론에 의하면 “당시 범인은 정신과병원에 입원 중이었지만, ‘개방병동’이라 어느 정도 자유롭게 외출이 가능한 상태에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범인에게는 징역 25년형이 선고됐다. 유족들은 “병원 측이 적절한 판단을 했다면 사건을 막을 수도 있었다”면서 병원을 제소해 책임을 물었다. 정신적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위험한 것이 아니라, 환자마다 적절한 보호와 치료가 필요하며 상태에 따른 대처의 중요성을 따져 물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관련 재판에서 병원 측의 책임은 일절 인정되지 않았다.
이처럼 유족 측 입장에서는 납득할 수 없는 판결이 많았던 게 사실이다. 반면, 오랜 싸움 끝에 입법을 이룬 유족도 있었다. 1966년 요코하마시에서 26세 남성이 생면부지의 19세 소년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피해자 남성은 숨을 거두기 직전 아버지에게 “원한을 갚아 달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초 아버지는 “가해자 소년을 똑같이 살해할 각오마저 했다”고 한다. 하지만 마음을 고쳐먹었다. 가족을 불합리하게 빼앗기고 살기 어려워진 유족이 많다는 사실에 놀라 ‘범죄피해자보상제도’를 촉진하는 모임을 결성했고, 피해자 구제를 위해 10년 가까이 애썼다. 그것이 아들의 원수를 갚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병으로 쓰러져 1977년 세상을 떠났으나, 4년 뒤인 1981년 범죄피해자 등 급부금 지급법이 시행됐다.
“누구라도 좋으니까 살해하고 싶었다.” “세상이 싫어 사형당하고 싶었다.” “큰 사건을 일으켜 분노를 알리고 싶었다.” 무차별 범행을 저지른 가해자들의 동기는 다양하다. 그때마다 일각에서는 “양극화된 사회구조(격차사회)에도 원인이 있으며 가해자는 현대사회가 낳은 괴물”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특히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경우라면 질병에 대한 편견을 낳을 수도 있어 조심스러운 것이 당연하다. 주간여성은 “그렇다 하더라도 길에서 느닷없는 죽음을 당한 피해자의 억울함과 유족의 고통을 방치하는 일본 사회 분위기에는 의문이 든다”고 전했다.
가가와현에서 아들을 살해로 잃은 유족은 “가해자 측 변호인으로부터 ‘당신들은 지금 정신장애인에게 죄를 지으려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고통의 구렁텅이에 빠져있음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정황은 흐려지고 세상도 사건을 잊어버린다. 더욱이 범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경우라면 진상규명은 강제로 중단되고 만다.
2019년 5월 28일, 가와사키시에서는 등굣길 초등학생들을 상대로 무차별 흉기난동 사건이 발생했다. 스쿨버스를 기다리던 초등학생과 보호자들을 괴한이 덮쳐 18명이 다쳤고, 그중 초등학교 6학년 여아와 39세 학부모가 사망한 사건이다. 가해자 남성은 범행 후 자해해 그 자리에서 숨졌다. 1991년에도 사이타마현에서 10명을 낫으로 습격한 남성이 사건 현장에서 스스로 분신해 숨진 사건이 있었다.
사건 자체가 미해결된 경우도 눈에 띈다. 유명한 것이 1959년 발생한 ‘연속자전거 무차별 살상사건’이다. 도쿄에서 자전거를 탄 남성이 1시간 동안 10명의 여성을 흉기로 찌르고 달아난 사건으로, 1974년 범인을 특정하지 못해 공소시효가 성립됐다. 2007년 교토시에서 발생한 ‘대학생 길거리 살인사건’도 15년이 경과했지만 여전히 미해결인 상태다.
무고한 사람이 갑자기 목숨을 잃었을 뿐 아니라 그 진상조차 규명되지 않는다. 피해자의 억울함, 유족들의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주간여성은 “무차별 살상이 일어나지 않는 사회를 구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겠지만, 그것이 어렵다면 적어도 피해자를 방치해서는 안 될 문제”라고 거듭 강조했다.
강윤화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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