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영등포 시장 인근에 위치한 정맥기원. 마치 카페처럼 쾌적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
모든 일이 부질없는 짓이 될 그날이 와도 살아남을 세 가지는? ‘3R’이라고 했다. 첫째는 종교(Religion)다. 과학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아무리 백 년 이상 무병장수하며 즐겁게 산다 해도 삶과 죽음, 영혼과 신의 문제는 미해결의 영역으로 남으리라는 것. 둘째는 관계(Relation). 사람 사이의 관계, 윤리다. 혼자 사는 것이 아니므로.
셋째는 레크리에이션(Recreation). 일은 안 해도 되게끔 되었지만, 일을 안 한다고 놀지도 않을 수는 없으니까.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살까, 뭐가 재미있는 것일까에 대한 연구는 끝없이 이어지리라는 것.
첨단 온라인 바둑에 밀려날 것 같던, 백 년도 더 된 낡은 오프라인, 기원이 요즘 솔솔 생기고 있다. 기원은 근대화의 순서에서 거의 맨 뒤에 있던 구닥다리. 1990년대 무렵부터 대도시에는 ‘모던’한 기원들이 등장했지만, 예나 지금이나 몇몇을 빼고는 돈 하고는 거리가 있는 그늘의 업종이라는 것이 통념인데, 최근 몇 달 사이에 이색적인 기원 몇 곳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문을 열었다.
‘온양기원’이 충남 아산시 온천동 네거리에서 지난 8월에 간판을 달았다. 아산시 온천동은 좀 생경하다. 옆에 신시가지가 개발되면서 구시가지로 밀려났지만, 예로부터 온양온천으로 명성을 날리던 곳, 지금 온양온천역 인근, 온양관광호텔 앞이다. 일대에서는 그래도 제일 번화한 로터리다. 온양기원은 로터리에서 덩치가 큰 건물 1층 코너에 있다. 로터리에 있는 기원이 없지는 않지만, 건물 1층에 있는 기원으로는 유일할 것이다.
얘기를 들은 사람이나 오가며 기원을 보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일단 고개를 갸웃한다. 아니 무슨 기원을 목 좋은 로터리 건물 1층 코너에 열었담. 전혀 뭘 모르는 사람이야, 아니면 용감한 사람이야? 그것도 한창 더울 때고 피서철인데. 몇 달 못 가겠네. 그러나 지금까지 6개월째 잘 버텨오고 있다.
“제가 바둑을 좋아합니다. 여기가 고향인데, 기원이나 바둑교실 같은 게 별로 없어요. 주변에서는 다들 말렸지만, 이제 나이도 있고 해서 기왕이면 고향에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손님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어요. 단골도 생겼습니다. 가끔 지나가던 초등학생이 간판을 보고 들어와 바둑 배울 수 있느냐고 묻기도 해서 바둑교실과 병행할까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수입이요? 당분간 출혈을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쉽게 포기하지는 않을 겁니다. 남들이 시설이 좋다고 하네요. 바둑 두는 분들은 온양에도 이런 기원이 하나쯤 있어야 한다고 격려를 많이 해 주십니다. 내 나름으로는 보람이 있지요.”
최중한 원장(56)이 웃는다. 최 원장은 사실 바둑계 식구나 마찬가지다. 용산고 기우회 총무를 꽤 오래 맡았었고, 요즘도 고교동문전이 열리면 만사 제쳐놓고 온양에서 왕십리 한국기원 바둑TV 스튜디오까지 발품을 판다. 2005년 무렵에는 서울 강남 교대 앞에서 ‘명인기원’을 운영한 경력도 있다.
9월에는 프로기사 김일환 9단(55)이 서초동에서 ‘가백기원’을 열었다. 전철 2호선 서초역 1번 출입구로 나와서 몇 걸음 앞에 있는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가 100여m 내려가면 오른편에 붉은 벽돌 3층 건물이 보인다. 바로 옆에는 덩치가 아주 큰 현대 주상복합 건물이 있고 주변은 주로 식당들이다. 기원이라기보다는 아담한 사무실이나, 연구실 같아 분위기가 자못 우아하다.
주말에는 모임이 많아 장소가 좁게 느껴지지만, 평일에는 조금 한가해 김 9단이 스스럼없이 지도기를 두어 준다. 바둑은 난전의 명수로 알려져 있지만, 수줍음이 많고 그지없이 사람 좋은 김 9단. 다른 기원에 비해 바둑을 뜻밖에 잘 두는 젊은 여성을 자주 볼 수 있는 것도 가백의 특색이라면 특색이다.
11월에는 ‘정맥기원’이 영등포 시장 로터리, 당산역 가는 쪽, 1층에 파리바게트가 있는 5층 건물의 4층에서 오픈했다. 4층 전체가 기원이다. 영등포는 예전에 서울기원 화랑기원 등이 장안의 바둑명소였고 지금도 ‘넓은 실내, 저렴한 기료’를 내세우고 있는 ‘쟈스민기원’이 있는 곳.
정맥기원은 금연실-흡연실 60여 석 규모에 특별대국실 연구실에 응접실 식당 샤워실까지 갖추고 있다. 규모와 시설이 놀랄 만하다. 이제 정맥기원이 영등포의 바둑전통을 계승하면서 영등포의 영화를 재현할 것으로 보인다. 12월 4일에는 ‘바세바’ 회원 80여 명이 여기서 창립식을, 10일에는 국민은행 기우회가 송년모임을 가졌다. ‘바세바’는 ‘바둑으로 세상을 바꾸자’는 뜻. 아무튼 ‘바꾸자’도 좋고, ‘바꾼다’도 좋고, ‘바꿀 수 있다’도 좋다. 바둑과 인문학적 소양의 접목을 꿈꾸는 바둑계의 조직 전문가 양종호 씨(51)를 중심으로 명지대 바둑학과, 연구생, 연구생 출신, 프로기사 초년병들, 청춘 남녀 바둑인들이 모였는데, 현재 등록회원수가 400명이 넘었다. 이만한 세력이라면 정말 바둑으로 세상을 바꿀지도 모르겠다.
최영회 원장(54)은 아마강자 모임인 ‘정맥회’의 회원. 당연히 정맥회의 본부처럼 되어 있어 가면 이름 난 전국구 강자들을 만날 수 있다.
도대체 운영비를 어떻게 감당할 것이냐는 질문에 영등포 최 원장도 온양의 최 원장처럼 웃는다. “예전에 금호동에서 기원을 할 때도 그랬지만, 크게 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바둑 두는 공간’을 문화유산으로 지켜가고, 남기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렇다. 지난날 유럽의 카페가 그랬듯이 우리는 기원이 그런 역할의 장소가 되었으면 좋겠다. 온양과 가백과 정맥이 오래 가기를 바란다. 바둑인들이 자주 들러주었으면 좋겠다. 그러고 보니 바둑은 ‘미래학자들의 3R’과, 디지털의 극단에서 2개, 릴레이션과 레크리에이션을 공유하고 있다. 디지털의 세상에서 온라인의 물결을 타고 흘러가면서도 사람들은 때가 되면, 사람이 그립고 관계의 끈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목적에 쫓기는 노동을 잠시 접고 목적 없이 그냥 놀 수 있는 곳을 찾아 오프라인으로 서로를 부른다. 연말에는 이들 기원들도 붐빌 것이다. 모여서 이를테면 정신의 빈티지를 즐길 것이다.
이광구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