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지석 7단 |
안국현 3단, 강유택 4단에 이어 한국 팀 3번 주자로 출전한 김 7단은, 4연승으로 포효하던 중국의 18세(당시) 괴물 신예, 현 중국 랭킹 2위인 탄샤오 5단의 5연승을 저지하면서 이번 삼국지의 물길을 틀었다. 기세를 탄 김 7단은 계속해서 일본의 마지막 주자, 자국 랭킹 2위, 일본 바둑계 서열 2, 3위인 ‘명인’ ‘본인방’을 갖고 있는 야마시타 게이고 9단(34)을 큰 차이로 따돌리며 일본을 탈락시켰고, 재중동포 박문요 9단(24)을 제압, 3연승을 기록했다.
2차전이 끝난 시점에서 한국은 김 7단을 비롯해 원성진 9단과 이창호 9단 등 세 사람, 중국은 서열 1위 씨에허 7단(28)과 3위인 구리 9단, 둘이 남았다. 김 7단의 다음 상대가 누구일지 궁금했다. 서열로는 씨에허 7단이 앞서지만, 그간의 관록으로 미루어 아무래도 주장은 구리 9단일 터이니, 씨에허가 나오리라는 예상이 많았지만, 빗나갔다. 구리 9단이 등장한 것.
구리의 등장을 김 7단이 반겼다는 후문이다. “지금까지 네 번 만나 모두 졌다. 삼성화재배에서만 세 번을 졌고, BC카드배에서 한 번 졌다. 설욕할 기회를 기다렸다”는 것. 과연 21일 그날 구리를 상대로 김 7단은 또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착하고 여자처럼 생겨 ‘엄친아’로 통하는 김 7단이지만, 그날은 자세에 날이 서있었다. 바둑 내용도 그랬다. 거침없이 쳐들어갔고, 타협 없이 맞받아쳤다. 그리고 승부의 분수령에서 빈틈없는 수순을 밟은 정확한 수읽기 일발로 구리의 대마를 격침시켰다.
일류급 기사라면 모두 그렇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두 사람은 수읽기와 전투력을 자랑하는 기사인데, 이번에는 김 7단의 수읽기가 한발 앞섰다. 한국 팀 응원석은 하이파이브를 하며 “역시 김지석!”을 외쳤고, 적국의 응원석에서도 “정밀의 극치를 보여 준 수읽기”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정말 김지석이 끝내주는 줄 알았다. 5연승으로 화룡점정의 마침표를 찍는 줄 알았다. 크게 한 꺼풀 벗으며 명실공히 세계 정상급에 이름을 올려놓는 줄 알았다. 기량은 분명히 세계 톱클래스인데, 분명히 한국의 차세대 주자인데, 결정타 한 방이 없는 김지석이었다. 아깝다. 그래도 마음은 좀 놓인다. 구리와 탄샤오를 꺾은 것이 컸으니까. 구리는 세계 정상으로 가는 길목에서 한번은 거쳐야 할 관문이고, 탄샤오는 요즘 중국에서 모두가 상대하기 꺼려하는 괴동이라니까 말이다.
소개하는 기보는 구리와의 대국. 김지석이 흑이다. 초·중반까지 흑은 ‘선착의 효’를 유지했다. 요즘은 덤이 커서 선착의 효라는 말이 슬그머니 없어진 느낌이지만 어쨌든. 중반 전투 과정에서, 검토실의 표현을 빌리자면, 조금 느슨하달까, 약하달까, 그런 수를 하나 두었다. 국면이 팽팽해졌다.
<2도> 백1부터 귀를 건드린다. 아래 백 석 점을 잡아가면 귀를 도려낸다는 것인데, 여기서부터 김지석의 수읽기가 발동했다. 백5 다음 흑은 아래 백을 끊어 잡을 수 있다. 그러나 흑6으로 귀를 막고 있다. 공을 백에게 넘긴 것. 어느 쪽을 버리고, 어느 쪽을 살리겠느냐.
백7은 구리가 자신의 수읽기를 믿은 수로 보인다. 양쪽을 다 살릴 수 있다는 것. 그러자 흑8의 센터링. 계속해서….
<3도> 백은 1로 이어 일단 아래를 살렸고, 흑은 2로 끊었다. 백3에서 5면 흑8이 불가피하니 그때 백9로 젖히면 이쪽도 그냥 잡히지는 않는다는 것. 다음 흑A엔 백B, 패로 버티는 수가 있으니까. 이게 구리의 수읽기였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계속해서….
<4도> 흑3으로 젖히고, 백4에는 흑5로 키우고, 백6 막을 때 흑7 두 번째 센터링! 이게 구리의 수읽기에 빠져 있던 김지석의 묘수, 필살의 일격이었다. 이걸로 백 대마는 함몰이었다. 흑7 다음….
<5도> 백1이면 흑2로 넘어간다. 백3으로 단수쳐봤자 흑4로 이어 그만인 것. 백1로 먼저 3에 끊어 단수치면 흑1로 끊어 양단수. 또….
<6도> 백1도 소용없는 수. 흑2로 넘어가 역시 그만이다. 백3에는 흑4의 먹여치기.
검토실은 “김 7단의 묘수 작렬이긴 하지만, 구리 9단도 이 정도 수읽기를 못할 리 없는데, 순간적인 방심, 착각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적장에 대한 예우다.
방심인지 착각인지 몰라도 어쨌거나 구리 9단으로서 조금은 무안했을 것. <4도> 백8로 손을 돌릴 때는 다소 붉어진 얼굴이었을 것이다. 이후 김 7단의 빗장 수비대형으로 전환했고 구리 9단은 얼마를 더 뛰어보다가 돌을 거두었다.
김지석은 다음 상대 씨에허에게 1집반을 져 5연승을 놓쳤다.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다만 이제 예전처럼 초조하거나 안타깝지는 않을 것 같다.
이광구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