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요신문 DB |
‘비운의 황태자’라는 수식어처럼 쫓겨나듯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이 씨는 과연 어떤 삶을 살았을까. 이 씨의 회고록과 비화를 통해 은둔의 삶으로 점철돼 온 이 씨의 기구한 인생역정 및 그를 둘러싼 소문과 진실을 따라가 봤다.
이맹희 씨는 아버지 이병철 회장과의 갈등 이후 오랫동안 은둔생활을 해 왔다. 삼성가 상속 분쟁이 시작되면서 이 씨가 중국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뿐 이전까지 그의 근황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나마 세상에 알려진 이 씨의 이야기는 지난 1993년에 출간된 자서전 <하고 싶은 이야기> <묻어둔 이야기> 등에 나온 내용이 전부였다. 그 중에서도 이 씨의 대표적인 비화는 ‘이맹희 납치사건’이다. 동생 이건희 회장에 밀려 삼성그룹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지 오래됐지만 그가 처음부터 그룹 대권 승계에서 밀려났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 씨는 1966년 한국비료 사카린밀수사건(한비사건)으로 이병철 회장이 경영일선에서 물러나자 총수 역할을 맡아 본격적으로 경영을 이끌기도 했다.
당시 이 씨는 한비사건의 오욕을 씻자며 ‘삼성재건 5인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삼성 경영체제에 일대 혁신을 추진했다. 하지만 이 씨의 이런 혁신적인 움직임은 모든 이에게 공감을 얻지는 못했다. 실제로 이 씨는 홍진기 전 중앙일보 회장(이건희 회장의 장인)을 불러다 무릎을 꿇게 하는 등 창업공신들(이병철 회장의 측근)과 자주 마찰을 빚기도 했다. 결국 홍 전 회장을 비롯한 창업공신들은 이 씨에게 강하게 반발했고, 이때부터 삼성비서실이 가담한 이 씨의 납치 계획이 세워졌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 씨의 납치극을 위해 부산의 모처에 장소가 미리 준비됐고, 하수인으로 무술 고단자인 김 아무개 씨와 부산 백병원의 이 아무개 과장 등이 가담하기도 했다. 그러나 납치극은 사력을 다한 이 씨의 기지로 실패로 돌아갔다. 다행히 납치의 위기는 모면했지만 이 씨는 이후 총수직 승계 6개월 만에 도중하차했다.
1973년 경영권에서 물러난 뒤 이 씨는 ‘아버지의 눈 밖에 난 자식’으로 낙인 찍혀 보이지 않는 냉대와 갖은 소문과 구설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사건은 이 씨가 일본 유학시절 이병철 회장의 일본인 부인으로 알려진 구라다 씨를 폭행했다는 소문이다. 세간에는 이 씨가 구라다 씨의 집에서 기거하면서 구라다 씨에게 욕설을 하는 등 못된 행동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심지어 이 씨가 구라다 씨를 범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하지만 이 씨는 자서전을 통해 “당시 구라다 씨의 집에 머물 때 우리 형제들이 계란 20개를 한꺼번에 먹어 치우자, 구라다 씨가 ‘이러다간 한 달 생활비로 일주일도 못 버티겠다’는 말을 했고, 그 때문에 구라다 씨에게 욕을 했다”고 해명했다. 또 이 씨는 “아버지와 나 사이에 일본인 여자를 두고 알력 다툼이 있었다는 것은 친한 소설가의 소설에서 나온 이야기”라고 주장했다.
이 밖에도 이 씨는 그룹 안팎에서도 괴소문에 시달렸다. 1979년 이 씨는 당시 치안본부(현 경찰청)에서 근무하던 친구에게서 “삼성에서 네가 성광증이 심해 서울대병원에 입원시키려는데 형사 두 명만 보내 달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고 한다. 자신을 정신이상자나 성광증 환자로 몰리고 있다는 얘기를 이 씨가 처음 듣는 순간이었다.
자서전에 언급된 내용 외에도 재계 주변에서는 이 씨와 관련된 소문이 끊이질 않았다. 대표적인 사건은 이 씨가 경영권에서 밀려나는 또 다른 요인으로 작용된 것으로 알려진 이른바 ‘별장부인 스캔들’이다.
1975년 경기도 가평에는 이병철 회장의 별장을 비롯해 재벌총수들의 별장이 몰려 있었다. 당시 이 회장의 별장에는 장남인 이 씨도 자주 놀러 갔던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이 씨가 미모의 별장지기 아내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는 점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별장지기 남편에 의해 목격됐고, 이 사실은 이 회장에게도 보고가 됐다. 이 회장은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별장지기 부부에게 거액의 돈을 줬고, 이후 이 씨는 이건희 회장에게 밀려 낭인 생활을 시작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병철 회장의 귀에 전달된 이 씨의 스캔들은 또 있었다. 바로 혼외자식 논란으로 화제를 모았던 박 아무개 씨 사건이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서울 남산동에 위치한 고급 사교장에서 이뤄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20세였던 박 씨는 영화 <황진이의 일생>에 단역으로 출연한 신인 영화배우였다. 박 씨는 이 씨가 이병철 회장의 장남이고 결혼한 상태라는 사실을 알고도 이 씨와 만남을 가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두 사람은 동거를 시작했고 1963년 아들 이재휘 씨(47)를 출산했다. 1964년 무렵 이병철 회장은 이 사실을 알고 대로했다고 한다. 결국 박 씨는 이 씨와 헤어져야만 했다. 모자가 이 씨를 다시 만난 건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후였다. 1983년 여름, 미국으로 이민 가기 전 박 씨 모자는 부산에서 이 씨를 만났다. 그때 이 씨는 아들에게 자신의 이니셜이 새겨진 지갑, 금장 버클, 볼펜, 시계 등을 선물로 줬다고 한다. 이 씨는 아들에게 학비도 약속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2004년 당시의 아들은 법원에 친자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그리고 2006년 10월 대법원으로부터 친자확정 판결을 받았다.
이훈철 기자 boazhoon@ilyo.co.kr
“자기 정사 찍고 지인들과 품평회”
과거 B 씨를 만났던 모 기자는 그로부터 이 씨의 섹스비디오 사건과 관련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고 한다. B 씨에 따르면 이 씨는 상당한 여성 편력가였고, 자신이 소개시켜 준 여성들은 대부분 상당한 미모를 자랑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관심을 끄는 건 ‘섹스비디오’의 실체였다. 당시 취재를 담당했던 기자는 B 씨를 통해 비디오의 실체를 확인했고, 비디오 영상 속의 인물이 이 씨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B 씨에 따르면 비디오의 제작은 이 씨의 지시로 이뤄졌다. 이 씨는 여성과 관계를 갖기 전 부하직원들을 통해 미리 방안에 카메라를 배치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비디오를 찍은 뒤 지인들과 ‘이 여자는 어떻고, 저 여자 엉덩이는 어떻다’는 식의 품평회까지 가졌다고 한다.
이 씨는 섹스비디오 때문에 채홍사 B 씨의 남편으로부터 협박까지 당했다는 얘기가 지금도 언론계 주변에서 회자되고 있다. [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