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월 해임된 오인환 전 감독. 삼성에 대한 서운함을 숨기지 않았지만 고마움도 표시했다. 우태윤 기자 |
오 전 감독은 갑작스런 경질 이유에 대해 “사실 갑작스러운 것은 아니다. 이봉주 은퇴(2010년) 이후 국내 최고의 마라톤팀이던 삼성전자육상단이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다. 런던올림픽(마라톤 엔트리 남녀 각 3명)에도 대표선수를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다. 성적이 부진하면 지도자가 경질될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도 오 전 감독은 서운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 어떤 경질도 서운한 것이지만 그 정도를 넘어서는 듯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말을 아끼면서 나름 하소연이 나왔다.
“너무나 갑작스러웠다. 구단으로부터 사전에 어떤 언질이 없었고, 특히 ‘늘 들어올 때도 함께 왔으니 나갈 때도 함께하자’던 상규 형(임상규 감독)이 자신은 미리 알고 있었으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모른 척해 아주 서운했다. 경질 자체보다 쌍두체제에서 혼자 옷을 벗었고, 그 과정이 좀 매정했기에 속이 상한 것이다.”
오 전 감독은 충격이 컸고, 또 팀에서도 가능한 외부에 알리지 말아달라고 주문해 그동안 삼성에서 나온 것을 노출시키지 않았다고 했다.
이 대목과 관련해 삼성전자에도 내막을 물었다. 육상단의 조덕호 사무국장은 “본인은 서운할 것이다. 하지만 팀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이봉주를 제외하면 12년 동안 삼성이 키운 선수 중 풀코스 최고기록이 고작 2시간13분25초였다. 정말 성적이 나지 않아 팀의 존폐 위기론까지 나왔다. 변화를 주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 또 오 감독만 경질된 것에 대해서는 “임상규 감독은 여자와 경보에 주력했고, 오 감독이 남자 마라톤 전담이었다. 여자 마라톤도 성적을 내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지만 경보는 나름 큰 발전이 있었다. 마라톤에 변화를 준다는 측면에서 오 감독에게 책임을 물은 것이다. 또 마땅한 후임 감독을 찾지 못했다. 일단 2012년은 임상규 감독 체제로 운영하고 2013년부터 새 지도자를 영입할 복안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오 전 감독은 삼성에 대해 서운함을 숨기지 않았지만 고마움도 표시했다. “나오는 과정에서 충격을 받았지만 그래도 감사한 마음이 더 크다. 덕분에 40대 내내 세계 최고의 마라톤대회를 다니며 살아있는 공부를 많이 했다. 이 점에서 삼성에 감사한다. 그리고 삼성이 향후 팀 운영을 더욱 잘해 한국 최고의 육상팀으로, 세계적인 육상클럽으로 발전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대회 출전과 전지훈련 등 바쁜 일정으로 인해 늦둥이 쌍둥이들이 아빠 얼굴을 모를 정도였는데 요즘은 10여 년 만에 좋은 아빠 노릇을 하고 있다.”
▲ 오 전 감독은 이봉주와 함께 한국 마라톤의 자존심으로 10년 넘게 국내 정상 자리를 지켰다. 우태윤 기자 |
“공부도 좋지만 난 현장에서 가르치는 체질이다. 그리고 현재 한국 마라톤 지도자 중 내가 가장 많은 혜택을 받은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동안 쌓은 노하우를 혼자만 갖고 있어선 안 된다고 지인들이 얘기하더라. 지도자 생활을 일찍 시작한 까닭에 삼성에서 12년이나 몸 담고 있다 나왔지만 이제 53세다. 다시 현장으로 돌아갈 것이다.”
구체적인 계획을 물었더니 생각보다 큰 목표가 나왔다.
“일단 세계기록이다. 한국선수가 아니더라도 세계기록에 제대로 도전하고 싶다. 지난 3월 동아마라톤에서 2시간5분37초의 놀라운 기록으로 우승한 케냐의 에루페 같은 선수는 한국귀화가 가능하다. 에루페 말고도 아프리카와 중국 등에 좋은 자질을 가진 선수가 많다. 이들을 중심으로 팀을 창단해 세계적인 기록 경쟁에 뛰어드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마라톤의 스피드화 등 국내 선수의 발전도 함께 이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 전 감독은 올 하반기부터 새로운 육상팀 창단을 모색하겠다고 했다. 이는 아프리카 선수와 국내 유망주가 섞인 팀으로 단순히 국내 대회용이 아닌 세계무대에서 기록 경쟁을 펼치는 팀을 목표로 한다. 케냐의 마라톤 왕국 신화에 일조한 가브리엘 로자(이탈리아)의 한국판 스토리를 쓰고 싶은 것이다.
“육상과 마라톤은 인기가 있건 없건 포기할 수 없는 스포츠 종목이다. 가장 기본이 되고, 가장 원초적인 종목이기 때문이다. 특히 선진국일수록 육상과 마라톤에 대한 관심이 높다. 고 정봉수 감독님은 코오롱의 이동찬 회장님과 국민들의 성원이 있었기에 마라톤 중흥을 이끌 수 있었다. 앞으로도 뜻 있는 기업들과, 국민들의 큰 관심이 필요하다.”
전형적인 충청도 사람답게 말수가 적으면서도 느린 오 전 감독이 이 말을 할 때는 거침이 없었다.
유병철 스포츠전문위원 eine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