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올림픽 시즌이 돌아왔다. 1988년 가을, ‘88 서울 올림픽’의 팡파레가 울려 퍼지던 바로 그해 가을에 사상 최초로 프로바둑 세계 정상대결의 막을 올린 ‘잉창치(應昌期)배’가 올해 제7회를 맞았다. 우승 상금 40만 달러를 걸고 절정 고수들의 무림대회전을 창설한다는 소식에 가슴 설레던 것이 엊그제 같건만 벌써 24년, 4반세기나 흘렀다. 우리하고는 인연이 각별하다. 1989년 초여름 초대 우승 조훈현으로부터 1993년 제2회 서봉수, 1997년 제3회 유창혁, 2001년 제4회 이창호에 이르기까지, 그 시절 한국 바둑을 이끌었던 4인방의 군더더기 없는 4연속 우승 퍼레이드는 기적 같은 축복이었다. 2005년 제5회 때는 최철한이 나섰다가 중국 창하오에게 넘겨주었으나 2009년 제6회 때 찾아왔다. 그리고 이제 7회.
한국은 6명이 출전했다. 제6회 대회 우승-준우승의 성적으로 이번 대회 2회전 진출권을 확보한 최철한과 이창호, 국내 랭킹 1, 2위로 자동출전권을 받은 이세돌과 박정환, 그리고 국내 선발전을 통과한 원성진과 김지석.
중국은 랭킹 1~4위인 탄샤오 시에허 콩지에 장웨이지에, 여기에 구리 박문요 천야오예 치우쥔 류징 판팅위가 합류해 10명. 숫자가 제일 많다. 1996년생 판팅위 3단, 최근 경계의 대상이 되고 있는 중국 ‘무서운 10대’ 중의 한 사람이다.
일본은 조치훈, 하네 나오키, 다카오 신지, 유키 사토시 5명이고 대만은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장쉬와 자국의 왕윈쥔 2명. 유럽은 이미 여러 번 유럽 대표로 출전한 적이 있는 단골손님, 타라누 카탈린이 이번에도 이름을 올렸고, 미국은 중국계 왕후이런이 참가했다. 모두 24명. 이 가운데 최철한 이창호는 방금 말했듯 전기 시드이고, 이번 대회 시드는 한국 이세돌, 중국 구리 박문요 장웨이지에, 일본 조치훈, 대만 장쉬, 모두 8명이다. 이들을 뺀 16명이 1차 토너먼트를 벌이고 승자 8명이 시드를 받은 선수들과 함께 2차 16강 토너에서 격돌한다.
2회전 대진은 시드 8명과 1회전에서 이겨 올라온 8명을 섞어서 다시 추첨으로 상대를 정하는데, 가급적 같은 나라 선수끼리 만나지 않도록 번호를 안배한다. 8강부터는 추첨 없이 대진표대로 대국하며 준결승은 3번기, 결승은 5번기.
‘잉창치배’는 덤이 8점(우리 식으로는 7집반), 제한시간은 각자 3시간 0분이며 초읽기가 없고 대신 35분씩 3회 연장할 수 있다. 5월 23일 타이베이에 있는, ‘잉창치 바둑교육기금’ 대회장에서 열린 제1회전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앞쪽이 흑. 박정환-양후이런(흑 9점승) / 원성진-천야오예(흑 불계승) / 김지석-치우쥔 (백 1점승) / 콩지에-하네 나오키(흑 1점승) / 왕윈쥔-탄샤오(백 불계승) / 씨에허-타라누 카탈린(흑 불계승) / 유키 사토시-류징(백 불계승) / 판팅위-다카오 신지(흑 3점승)
박정환은 미국 대표에게 여유 있게 이겼고 원성진은 천야오예와 치열한 육박전을 벌이다가 비장의 팻감 한 방으로 불계승, 천야오예의 천적임을 다시 한 번 과시했다. 김지석은 치우쥔과 10시간 가까운 사투를 벌인 끝에 원성진과는 반대로 팻감 하나가 부족해 1점, 우리 식으로 반집에 분루를 삼켰다. 일본 두 사람과 대만 미국 유럽은 전부 탈락했다. 중국은 천야오예만 빼고 모두 올라갔다.
성적이 예전만 못한 요즘도 중국에서는 칙사대접을 받는 이창호 9단이 전야제 자리에서 우승 후보로 박정환을 지목했다. 후배 사랑이리라. 그런데 사실은 이세돌 9단도 노리고 있을 것이다. 자신은 이창호 다음 세대의 대표로서 선배들의 전통을 이어가야 하는데, 후배 최철한에게 순서를 빼앗긴 것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니까. 원성진이 팻감 하나로 천야오예를 격침시킨 장면을 소개한다.
<장면> 백1이 천야오예 득의의 한 수. 백을 효과적으로 보강하면서 백A로 끼워, 패로 흑 대마를 양단하겠다는 것. 꽃놀이패다. 그러나 원성진은 겁먹지 않고 흑2~8을 거쳐 우상귀 10, 반상최대를 차지했다. 미세한 국면. 우상귀를 백에게 빼앗기면 바둑은 진다. 우변 흑4는 7로 잡는 것도 있지만 후수. 흑4는 흑를 버리면서 이쪽을 선수로 마무리하려는 것. 계속해서….
<1도> 백1과 흑6으로 우상귀가 결정된 후 백은 7부터 공작에 들어간다. 상변 백13이 검토실을 긴장시킨 팻감 작업. “좋은 수군요. 여기에 팻감이 생겼으니 15로 결행할 수 있다는 거네요.”
<2도> 패싸움이 시작되었다. 백6은 자리 패따냄.
<3도> 게다가 백은 좌변 흑 대마에도 팻감 공장이 있다. 흑, 위기일발이다. 백6은 자리 패따냄.
<4도> 불꽃 튀는 패싸움 백병전이다. 백4와 10은 자리, 흑7은 흑 1자리 패따냄. 여기서 <5도> 흑1로 먹여치는 수가 역전의 팻감이었다. 흑3으로 따내자 백의 팻감은 4뿐. 흑은 5로 다시 따내고 백6으로 둘 수밖에 없을 때 흑7로 계속 따냈다. 선수!! 그리고 <1도> A로 달려가 미세하던 바둑을 대차로 만들었고 천야오예는 몇 수 더 두다가 돌을 거두었다.
원성진, 지난 연말에 구리를 꺾고 삼성화재배를 안았다. 그 상승세가 여전히 유효한 것처럼 보인다. 이번 16강 상대도 구리 9단이다. 이번 대회 주인공은 박정환도, 이세돌도 아니고 또 원성진일지도 모르겠다.
이광구 객원기자